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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07/대선주자 라이프 스토리-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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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07/대선주자 라이프 스토리-이명박

입력
2006.12.31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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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늦가을 어느날 오후. 경북 포항시의 한 시장 모퉁이에서 풀빵을 만들어 팔던 어머니와 아들이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알다시피 너를 고등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된다.”

“입학에서 졸업까지 전체 수석을 하면 3년 내내 등록금이 면제됩니다.”

“그럼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 학교에 가되, 등록금이 면제되는 동안만 다니는 거다.”

그 소년은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야간 상업고교를 전체 수석으로 들어가 무사히 졸업했다. 3년 내내 주야간 통틀어 전교 1등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소년이 요즘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다.

이 전 시장은 1941년 12월19일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 전 시장에 따르면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성냥개비에 황을 붙여 팔고, 김밥과 밀가루떡 장사도 했다. 중ㆍ고교 때는 엿, 아이스크림, 뻥튀기 등을 만들어 팔았다.

동지상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청계천의 헌 책방 주인이 준 책으로 공부해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상대 학생회장 겸 총학생회장대행을 맡았던 4학년 때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6ㆍ3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다.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반년 동안 복역한 뒤 풀려났다.

그 뒤 대학 졸업은 했지만 시위 경력 때문에 취직 원서를 낼 때마다 낙방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가가 세상을 살아가려는 개인의 길을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개인에게 영원히 빚을 지는 것’이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청와대는 이 일로 비서관회의까지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결국 회사에 들어간 뒤 문제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현대건설 입사를 허락 받았다.

‘현대 맨’이 된 뒤 그의 진가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입사 5년만에 이사직에 오르더니 12년 만인 1977년 35세의 나이에 현대건설 사장에 올랐다. 이후 현대산업개발, 인천제철, 대한알루미늄, 현대엔지니어링, 한라건설, 현대목재, 현대자원개발의 대표이사를 두루 지내면서 말 그대로 ‘샐러리맨의 신화’를 일궈냈다.

92년 14대 총선 때 15년간의 CEO 생활을 접고 ‘정치권에 경영 마인드 도입’을 외치며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5대 총선 때는 서울 종로에서 노무현ㆍ 이종찬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2년 6월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시장에 당선돼 곧바로 청계천 개발에 뛰어들었다. 당시 ‘청계천 개발은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여론이 많았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청계천 사업을 수행해냄으로써 ‘일하는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4년간 서울시장 재직 중 버스중앙차로제를 도입하고, 강북지역의 뉴타운 개발에도 공을 들였다.

퇴임 직후인 2006년 7월, 그는 박근혜 전 대표와 고건 전 총리에 이은 지지율 3위로 경선 레이스의 출발선에 섰다. 그러나 그는 3개월 만에 지지율 1위로 올라섰으며 그 뒤에도 계속 상승 곡선을 그렸다. 350일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그는 또 한번의 신화 만들기를 꿈꾸고 있다.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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