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불신 수준이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결과가 최근 발표되었다. 혈연과 지연으로 엮인 주변 사람들 이외의 낮선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부나 그 밖의 공공제도와 기관을 더욱 믿지 못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대부분 가족과 친지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난 바깥세상에 대해서, 믿을 수 없는 척박하고 험한 세상으로 보고 살아가야 하는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불신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이지만 가장 충격적으로 신뢰의 추락을 경험케 한 것은 IMF 외환위기였다.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평생직장으로 생각했던 곳에서 구조조정을 당하면서 기업에 대한 신뢰도 무너졌다. 연이은 기업의 도산과 개인의 파산 물결 속에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신뢰마저도 깨졌다.
이제 외환위기로부터 우리 경제는 벗어났다. 그런데도 무너지고 깨어진 신뢰는 우리 사회에서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 경제가 충분히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경제가 회복됨에도 불구하고 신뢰수준은 더욱 낮아지거나 정체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불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신뢰의 선순환과 불신의 악순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신뢰가 넘치는 사회에서는 신뢰가 신뢰를 낳고, 불신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불신이 불신을 낳는 것이다.
불신과 신뢰는 언제나 상호적인 현상이다. 내가 상대방을 신뢰하거나 불신하면 그에 따라서 상대방도 역시 나를 신뢰하거나 불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이 반복되면서 불신과 신뢰는 더욱 깊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을 벗어나 신뢰로 가려면 내가 상대방에 대해 믿는(trustful) 마음을 갖는 동시에 내가 상대방에게 믿을만하게(trustworthy) 보여야 한다.
경제적 거래에서 상대방이 믿음직하지 못할 때 우리는 위험부담만큼 상대방에게 담보를 요구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담보는 부족한 신뢰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뢰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상대방에게 믿을만하게 행동하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현실에서 많은 경우 대칭적이지 못하다. 권력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사이에서 실제로 더 믿음직하지 못한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인데 이들에게 부족한 신뢰에 대한 담보를 요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부와 국민, 기업조직과 직장인의 관계이다. 믿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세금을 내야 하고, 믿지 못하는 직장에서도 직장인들은 일을 해야 한다. 일종의 발목이 잡힌 상황인 것이다.
이러한 비대칭성 때문에 불신을 벗어나 신뢰로 가는 것은 권력을 가진 정부와 기업의 솔선수범하는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난 몇 해 동안 기업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수준은 조금씩이나마 개선되어 왔다.
그에 비해 정부에 대한 신뢰는 바닥수준에서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불신을 벗어나는 첫걸음은 정부가 해야 할 일 제대로 하고, 잘못한 일에 대해 제대로 책임을 지는 일이다.
한 준ㆍ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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