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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송년 콩트/ 돼지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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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송년 콩트/ 돼지면 된 거야

입력
2006.12.29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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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슈퍼의 골칫거리는 좁다란 이면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최마트였다. 올해 초 고기부페집이 문을 닫고 들어선 마트다. 이로써 오랜 세월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김슈퍼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무엇보다 김슈퍼가 골머리를 앓은 건 맞은편 최마트가 24시간 영업을 한 점이었다.

새벽 한 시면 문을 닫고 이층의 뜨끈한 방으로 돌아가 곤히 잠들던 그였건만, 맞은편 마트가 밤새 영업을 하자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최마트 저 놈이 돈 버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네.” 질투심에 시달리던 김슈퍼도 특단의 조치를 내려 그동안의 안이한 영업방식을 버리고 24시간 영업을 선언하였는데, 그 새로운 방침의 최대 피해자는 김슈퍼 자신이었다. 약 먹은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 일쑤요, 저녁과 아침을 헷갈려 하기 일쑤더니, 결국 매주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던 조기축구팀에서도 미드필더로 강등되고야 말았다.

까마득한 후배 최마트가 맞은편에 가게를 냈을 때 김슈퍼는 콧방귀를 뀌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장사의 장자나 알겠어?”그러나 최마트는 장자만이 아니라 사자까지도 두루 꿰고 있었다. 최마트는 오픈 기념 이벤트 대할인 행사를 무려 석 달 동안 끌고 갔다. 김슈퍼의 단골들도 슬금슬금 최마트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앉아서 당할쏘냐.

김슈퍼도 질세라 월드컵 기념 대이벤트를 열었다. 한국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하면 사용할 수 있는 2,000원 상당의 상품권을 만 원 이상 구매한 모든 손님들에게 안겨줬다. 이전의 단골들이 김슈퍼로 돌아왔다. 16강 탈락으로 상품권이 무용지물이 되는 바람에 김슈퍼는 대박이 났다. 최마트가 그런 김슈퍼에게 이기죽거렸다.

“형님은 우리나라가 탈락했는데도 마냥 좋수? 그러고도 조기축구회 총무라고 할 수 있어요?”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스트라이커로 각광받고 있는 최마트가 한없이 아니꼽던 김슈퍼였다. “뭐라고? 청소년들에게 담배나 파는 주제에!”이 말을 흘려들을 리 없는 최마트였다. “고발한 게 누군가 했더니 형님이었구려!”김슈퍼는 그건 오해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제까짓 게 그렇게 여기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싶어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이들의 대결의식은 점점 치열해져 갔다. 점포 앞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간이 포장을 설치하고 물건을 내놓으며 좁은 이면도로를 조금씩 먹어들어 갔다. 급기야 두 점포가 거의 맞닿을 지경이 되어 동네 사람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최마트 앞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는 게 아닌가. 김슈퍼는 이게 길조인지 흉조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날 오후 단속반원들이 나왔다. “이게 뭡니까?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는 있게 해야죠.”안면 있는 단속반원이 이렇게 말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김슈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흉조다! “한번만 봐주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거 아니겠소?” “젠장,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요. 민원이 들어왔기 때문에.” “대체 어떤 놈이 민원을 넣었소?” “그걸 말할 수는 없고, 그러니 평소에 사람들한테 인심도 쓰고 그러세요. 한 동네 사람들끼리 얼굴 붉히고 살아서야.”그러면서 단속반원은 최마트 쪽을 힐끔거렸다. 눈치 빠른 김슈퍼가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야 이 놈 최마트야! 네가 기저귀 차고 돌아다닐 때 이 형님은 동네 축구 대표선수였다. 그런데 네 놈이 이럴 수 있는 거냐?”

이제 두 사람은 아는 체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전처럼 경쟁적으로 슬금슬금 이면도로를 먹고 들어가 두 가게는 다시 거의 맞닿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최마트 쪽에서 대판 싸우는 소리가 났다. 김슈퍼가 고개를 내밀어 보니 최마트 내외가 서로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김슈퍼의 아내가 옆에서 혀를 찼다. “저이가 요즘 바다이야긴지 뭔지를 들락거리더니.” “바다이야기? 새로 생긴 횟집인가?” 아내가 눈을 흘겼다. “당신은 바다이야기도 몰라요?” “지금 횟집 가고 싶다고 투정하는 게야?” “에구, 내가 말을 말아야지.”

터줏대감인 김슈퍼와 신생 소장파 점포인 최마트의 경쟁의 열기는 겨울이 왔어도 식을 줄을 몰랐다. 12월에 접어들자 최마트는 ‘황금돼지해를 맞이하는 돼지띠 주인의 특별한 약속’ 어쩌구 하면서 추첨을 통해 사은품으로 황금돼지를 주겠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김슈퍼도 뭔가 조치를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황금돼지 운운하면 최마트를 따라하는 꼴인 것 같아 비위가 상했다.

에라 모르겠다, 손 놓고 지내는 동안 손님들은 김슈퍼를 한번 기웃거리다 최마트 쪽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이 의리없는 족속들아!” 최마트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한번 외쳐주면 속이 시원하련만. 김슈퍼는 여러 날 썰렁한 슈퍼를 지키다 기어이 복수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 네놈이 돼지띠라 이거지! 내 아주 너를 잘근잘근 씹어주마.” 김슈퍼는 아내를 닦달하고 딸과 아들을 단속하여 쌍춘년 마지막 날 저녁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슈퍼 앞 평상에 둘러앉았다.

간이포장의 출입문을 들춰놓았는지라 찬바람이 이 네 식구를 꼬챙이처럼 쿡쿡 찔러댔다. 큰딸과 작은아들은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고 네 식구 가운데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김슈퍼는 자신을 위해서는 소주를 따고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는 맥주와 콜라를 땄다.

“어찌 됐든 올해의 마지막 날이 아니냐. 자자, 다가오는 돼지해를 위하여!” 이렇게 부산을 떨며 삼겹살을 잘근잘근 씹어먹으며 소주를 마시며, 김슈퍼는 홀로 신났다. “주몽이 왜 주몽인지 아냐? 술 주에 꿈 몽이라, 꿈속에서도 술을 마신다고 해서 주몽이다. 주량이 그쯤은 되어야 나라를 세울 수 있지 않겠냐. 자고로 영웅호걸은 말술도 마다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송일국, 그렇지 그 친구 말이다. 얼마나 술을 잘 마시게 생겼냐. 자자, 꼭꼭 씹어 먹어라. 아주 잘근잘근. 옳지.” 큰딸과 작은 아들이 그 주몽은 그 주몽이 아니라 다른 주몽이라고 하는 바람에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김슈퍼가 헛기침을 했다.

“우리 가족은 말야 대화가 부족해, 대화가. 한 놈이 납치돼도 일주일은 지나야 알 수 있을 걸?”

김슈퍼는 돼지띠 최마트를 씹어먹기라도 하듯 비장하고도 엄숙하게 삼겹살을 먹었다. 김슈퍼다운 소심한 복수였다. 하지만 썩 흥이 나지는 않았다. 계획대로라면 최마트가 기웃거려야 하고, 그러면 어이, 돼지띠 동생, 내년엔 돼지처럼 잘 살아보게나, 덕담 같은 악담을 한 마디 날려주어야 하는 건데, 최마트는 초저녁부터 굳게 문이 닫혀있다.

“그나저나 고기 맛있네. 어디서 사왔어?” 김슈퍼의 아내가 대답한다. “지하철역 앞에 대형마트 생겼잖아요. 거기서 오늘 오픈 기념으로 반값에 주길래 사왔죠.” “뭐라구? 이 여편네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김슈퍼는 밥상을 엎을 듯 두 손으로 상을 잡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우리 가족은 말야 정말로 대화가 부족해.”

김슈퍼네 식구들의 흥겨운 건지 비장한 건지 알쏭달쏭하기만 한 저녁 만찬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최마트가 불쑥 그들 앞에 나타났다. 아이들이 인사를 하고 아내가 자리를 비켜주자 최마트가 염치도 없이 끼여들었다. 하필이면 그때 김슈퍼가 방귀를 뀌고 말았다.

“형님은 엉덩이로 핵실험 하시유?” 그 말에 작은 아들이 쿡 웃자 김슈퍼가 제 아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최마트가 히죽 웃으며 다시 말을 붙였다.

“형님, 고운 정도 정이고 미운 정도 정이지 않습니까. 올해 마지막 날인데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시구려. 저도 고기나 한 점 주십쇼.”김슈퍼는 노릇노릇 구워지다 못해 거뭇거뭇 타버린 삼겹살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옛다, 이게 황금돼지라는 것이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최마트는 정말 그 고기 한 점을 먹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잠시 뒤 김슈퍼의 아내가 혀를 찼다. “당신 인정머리 없는 거야 내가 잘 알지만 그래도 너무 하는 거 아녜요?” “내가 뭘? 저 녀석이 올 한 해 동안 내 골머리 썩힌 걸 몰라서 그래?” “가게도 내놓고 이사 갈 사람한테, 그것도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에서 함께 자라온 사람이라면서 그게 뭐유?” “이사를 간다고?” “가게 보증금은 올려달라지 살던 집도 전세금을 올려달라지…….” 김슈퍼는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이거 참, 우리 가족은 말야 대화가…….” 김슈퍼의 말을 자른 건 둘째다.

“와, 황금돼지다.” 둘째는 조그맣고 누런 돼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대화가 부족한 식구들에게 보여주었다. 큰딸이 귀엽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최마트가 슬쩍 놓고 간 것이리라. 김슈퍼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진짠지 가짠지 어찌 아누.” 아내가 끌끌 혀를 찬다. “진짜면 어떻고 가짜면 어때서요. 돼지면 된 거지. 왠지 내년에는 복이 통째로 들어올 것 같은 기분이 드네.” 김슈퍼는 포장 밖으로 나가 맞은 편 최마트를 바라보았다. 불이 꺼진 최마트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꼭꼭 씹어먹었는데도 얹혔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갇혀있던 방귀가 연달아 터져나왔다. 뿌웅뿌웅뿌뿌뿌뿌. 뒤에서 아이들이 추가 핵실험 어쩌고 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왠지 김슈퍼는 눈물이 날 것 같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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