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 선배를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훈련했다. 그 결과 나중에는 라이벌이 될 수 있었다. 스승 역도산 선생이 타계한 후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는데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나 슬프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전설적인 인물로 참의원까지 지낸 안토니오 이노키(63) 세계종합격투기연맹(WFX) 명예총재가 지난 10월26일 만성신부전 등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박치기왕’ 김일(77)의 빈소에서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했던 말이다.
‘박치기왕’ 김일의 죽음을 슬퍼한 이는 ‘동업자’였던 이노키 뿐만 아니었다. 1960~70년대 흑백 TV 앞에 모여 외국의 덩치 큰 프로레슬러를 박치기 한방으로 날려버리는 모습에 열광했던 국민들도 ‘인생의 링’에서 내려온 ‘전설’을 추모했다. 동시에 국민들은 고단했던 삶 속에서 느꼈던 ‘희망과 쾌락’의 추억도 영웅과 함께 묻었다.
1929년 전남 고흥의 한 섬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일은 씨름 선수로 이름을 날리다 56년 여수에서 선원들을 통해 얻은 일본 잡지 속의 역도산 기사를 읽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일본에선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 역도산”이라는 선원들의 말에 무작정 일본으로 밀항했던 김일은 57년 도쿄 역도산체육관 문하생 1기로 프로레슬링에 발을 들여놓았다.
김일과 맞붙었던 모든 레슬러들에게 공포를 안겨줬던 ‘박치기’도 이때 탄생했다. 함경도 출신으로 일찍부터 평양 박치기의 위력을 알고 있었던 역도산은 “너는 조선사람이니 박치기 기술을 익히라”며 재떨이, 골프채 등으로 김일의 이마를 혹독하게 단련시켰다.
김일은 6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챔피언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30년간의 현역 생활 동안 20여차례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화려했던 현역 생활과는 달리 김일의 말년은 사업 실패와 투병으로 얼룩졌다. 80년대 중반 활어 수출 사업이 실패해 큰 병을 얻었고, 이후 박치기 후유증과 당뇨병에 시달리며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열렬한 팬이었던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도움으로 지난 94년부터 무료 입원 치료를 받아왔지만 고혈압, 하지부종, 신부전증 등 각종 질환이 김일을 괴롭혔다.
그는 지난 3월엔 일본으로 건너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했던 한국 야구대표팀을 격려하는 등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였으나 끝내 세월을 거스르진 못했다.
한준규 기자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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