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 개발 정보 유출하고, 로비로 TV시청료 올리고, ‘가라공문’으로 판공비 빼돌리고….”
정년 퇴임을 앞둔 한 공무원이 공직 사회의 옛 부조리에 대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산업자원부 이경호(59) 서기관은 28일 부정부패와 정책 실수, 비합리적 관행 등 과거 공무원 사회의 부조리를 파헤친 ‘과천블루스’(지식더미)를 발간했다. 이 서기관은 1976년부터 30년간 경제기획원, 재정경제부, 산자부에 재직했으며 31일 옷을 벗을 예정이다.
이 서기관은 이 책에서 건교부장관이 판교 신도시 개발계획을 발표하던 날, 건교부 직원들은 이미 5년전에 판교 땅을 사들였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동료 사무관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폭로했다.
그는 “건교부가 산하기관에 신도시개발 용역을 주고 보고서를 받는 과정에서 개발정보가 알려지게 된다”며 “건교부 직원들은 이 정보를 친ㆍ인척에게 알려주면서 땅 구입을 권하는 일이 많았다”고 강조했다. 또 중개업자 등이 공무원에게 돈을 주고 용역보고서를 빼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그는 서울 강남의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이 같은 정보를 입수, 땅구입을 한 사람들이 정부 발표 후 막대한 매매차익을 챙겼다고 비판했다.
‘TV 시청료 2,500원’이 로비의 결과라는 폭로도 있다. 이 서기관은 81년 컬러TV 시청료 결정과 관련, 실무를 맡았을 때 “한국방송공사(KBS)가 요청한 2,500원의 시청료가 너무 높아 1,100원이 적정하다”는 의견을 올렸다. 이에 대해 KBS측은 집요한 로비를 벌이기 시작했고 결국 시청료는 2,500원으로 확정됐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1988년 시행된 국민연금 제도의 경우 주무부서에서 1986년 ‘국민연금이 50년만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2049년 고갈된다’는 한국개발연구연(KDI) 보고서를 근거로 시행을 3년 연기하자고 건의했으나, 노태우 대통령 선거공약이라는 이유로 시행이 강행됐다는 것.
이 서기관은 기금 고갈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KDI가 이미 만들어진 기금수입 모형에 수익률 변동치 등 숫자만 바꿔넣으며 향후 기금의 전망을 추정해 내는 연구용역 보고서로 ‘불로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의 극한 파업의 진원지는 너무 많은 임금을 주는 금융기관으로 이들의 고임금을 막으려면 임금관리 방안이 필요한데, 이기적인 재경부 장ㆍ차관 등 고위직들이 퇴직 후 금융기관 근무를 위해 고임금을 조장하고 있다는 색다른 견해도 밝혔다. 또 무역위원회에 근무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대책에 골몰하는 자신에게 ‘혁신과제’를 요구하는 상황을 꼬집으며 참여정부의 혁신정책을 ‘우수마발(소의 오줌과 말의 똥이라는 뜻으로 가치가 없다는 의미) 혁신’으로 규정했다.
또 ‘사무관 임명장 붓값 10만원’, ‘국조 전문털이, 행정계장’ 등 제목만으로도 관가의 부정부패와 부조리를 느끼게 하는 내용들이 책에 포함돼 있다. 이 밖에 매년 수백억원의 판공비와 출장비가 소위 ‘가라 공문’을 통해 집행돼 온 점과 200만원짜리 명패를 만든 차관등에 대해서도 비판의 화살을 쏘았다.
이 서기관은 “책에서 사례로 든 불합리한 모습들은 본인의 근무 초기인 1970~80년대에 벌어졌던 사례들로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며 “공무원 사회를 더욱 혁신하고 개선시키자는 취지에서 공무원 사회의 긍정적인 모습들과 과거 부정적 모습들을 비빔밥식으로 섞어 쓴 것”이라고 해명했다.
박진석 기자 jse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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