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1일. 독일에 프린터를 수출하는 국내 한 기업은 비상이 걸렸다. 프린터를 실은 화물기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으나 제품이 세관을 통과하지 못했다.
프린터에서 발생하는 휘발성위기화합물(VOC)을 유럽연합(EU) 화학물질청(ECA)에 등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CA는 이날부터 제품에 함유된 화학물질의 성분과 함량을 신고하지 않으면 통관시키지 않았다. 수출이 막힌 이 회사는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EU의 환경장벽을 넘어라.
이 벽을 넘지 못하면 가상의 시나리오가 최악의 현실이 된다.
EU 25개 회원국 환경부 장관들은 최근 신화학물질관리제도(REACHㆍ화학물질 등록과 평가 및 승인)를 승인했다. 화학물질의 안전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이 물질은 물론, 이를 포함한 제품도 유통될 수 없도록 한 법이다. 우리 기업은 이 엄청난 환경장벽을 뛰어넘지 못하면 나사 한 개, 비누 한 장도 수출할 수 없다.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은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이 제도는 EU 회원국의 40여개 화학물질 관련 법령을 통합한 것으로 내년 상반기까지 각 회원국에서 공포된 후 2008년 12월 1일부터 본격 시행된다. 제도 도입의 명분은 유해화학물질로 환경이 파괴되고 인체 피해도 위험수위를 넘어 대책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도 적용 시 역내 기업과 역외 기업을 은밀하게 차별할 수 있어 강력한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 제도에 따라 EU에 수출하는 역외 기업과 유럽 내에서 제품을 만드는 역내 기업은 2008년 6~11월 제품에 포함된 화학물질이 유해하지 않다는 자체적인 판단이 설 경우 성분과 함량을 EU 화학물질국(2008년 화학물질청으로 승격)에 의무적으로 사전 등록해야 한다.
제품에 포함된 화학물질이 연간 1,000톤 이상일 경우 사전등록 후 3년 6개월, 100톤 이상일 경우 사전등록 후 6년 이내에 인체나 환경에 유해하지 않다는 과학적 분석내용을 첨부해 본등록을 하게 된다. 2008년 11월까지 사전등록을 하지 못하면 제품 유통은 전면 금지된다. 2008년 12월 이후 등록할 경우 최종 허가까지 수개월~수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속수무책인 국내기업
지난해 국내 기업은 EU 국가에 436억6,000만달러 어치의 제품을 팔았다. 이 많은 제품이 수출길이 아예 막히거나 막대한 돈을 들여 유해하지 않은 소재로 바꿔야 한다.
또 화학물질 분석과 등록과정에서도 돈이 든다. EU는 화학물질 등록비용을 건당 최소 수천만 원에서부터 최대 수십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우리나라와 화학산업규모가 비슷한 영국은 등록비용을 약 9,300억원으로 추정했다. 우리나라 환경부는 최소 1조원, 최대 2조원 가량 소요될 것으로 내다봤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곤 국내 거의 모든 기업이 REACH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환경부가 최근 화학물질과 완제품 제조ㆍ수출업체 3,000곳을 대상으로 이 제도에 관한 설문지를 배포했으나 응답률이 4%(127개 업체)에 그쳤다. 산업체와 관련 협회, 연구소를 대상으로 한 전자우편설문에 응답한 비율은 0.07%였다. 거의 대부분의 국내 기업이 REACH에 대해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응답자 가운데 REACH의 개념을 모르는 경우도 30%에 달했다. 63%는 ‘등록시한을 모른다’고 답했다.
관심을 갖고 대응하려 해도 화학물질 성분 및 함유량 분석 인프라가 부족해 문제다. 성분을 시험ㆍ분석하는 국내 기관은 8개 밖에 없으며 생태독성분야를 분석하는 기관은 단 2곳이다.
●환경부 대응조직 운영
환경부는 2003년 국립환경과학원에 실무대책반을 편성한 데 이어 올해 환경부 내에 추진기획단을 설치, 대응방안을 연구 중이다. 환경부는 최근 맞춤식 One_Stop 서비스 체계를 구축하고 국내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달 산업계를 대상으로 관련 세미나를 개최, 기업들에게 REACH 대응방안을 설명했다.
또 REACH 전용 홈페이지(http://reach.me.go.kr)를 개설, EU 동향과 등록 실무지침을 안내하고 있다. 환경부는 업종별로 전문가를 선임해 등록에 필요한 절차 등을 돕고 있다. 내년부터는 정기적으로 업계 관계자에게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러나 외교통상부 산업자원부 등 범정부적 종합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또 화학물질의 성분을 분석, 평가하는 기반이 취약하다.
최흥진 환경부 환경정책보건과장은 “국내 기업들이 당장 화학물질 성분을 분석하지 않으면 2008년 12월부터 유럽 수출이 원천적 불가능해진다”고 경고했다.
송두영기자 dyso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