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가 이재현이 본보에 연재해 온 가상인터뷰 <대화> 가 어제 42회로 마무리됐다. 인터뷰는, 저널리즘에서 좁은 의미로 쓰일 땐, 인터뷰어(interviewerㆍ주로 직업 저널리스트)가 인터뷰이(intervieweeㆍ특정 영역의 취재원)의 의견을 들어 옮기는 취재형식이나 기사형식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재현이 실천한 것은 ‘가상’의 인터뷰이므로, 일종의 거짓 취재이자 거짓 기사다. 대화>
실은 인터뷰라는 것 자체가 미국인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1914~2004)이 40여 년 전에 명명한바 ‘의사사건(擬似事件ㆍpseudo-events)’ 곧 가짜사건에 속한다. 의사사건이란 오직 미디어에 노출되기 위해 존재할 뿐 실제 삶에서 그 밖의 기능이나 구실을 하지 않는 사건이나 행위를 뜻한다.
그 자체의 내재적 의미가 (거의) 없으므로, 의사사건은 미디어를 통해서야 ‘현실’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기자들을 초대해놓고 벌이는 이런저런 행사들이 대체로 의사사건이다. 인터뷰도, 그것이 미디어에 실리지 않으면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의사사건이다. 여느 의사사건과 달리, 인터뷰는 미디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의사사건이다. 미디어가 전하는 것은 인터뷰이의 의견이지만, 누구와 인터뷰할 것인가, 무엇에 대해 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인터뷰어(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인터뷰 자체가 의사사건, 곧 가짜사건이므로, 가상인터뷰는 두 겹으로 가짜사건이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좋아하는 하이퍼-(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다.
가상인터뷰 <대화> 에서 실존인물은 인터뷰어, 곧 이재현뿐이다. 인터뷰이는, 설령 특정한 역사적 인물과 포개져 있다 하더라도, 인터뷰어의 머릿속에서 가공(加工)된 가공(架空)의 인물에 가깝다. <대화> 의 인터뷰이 가운데는 리어왕이나 시마 고오사쿠(일본 만화 <시마 과장> 의 주인공)나 조사이어 바틀렛(미국 텔레비전 드라마 <웨스트 윙> 의 주인공)처럼 널리 알려진 픽션 속 인물도 있고, 된장녀 같은 관념적 전형도 있고, 에버원 같은 인간형 로봇도 있다. 더 나아가, 축구공이나 여론조사나 태극(기)처럼 날것의 사물이나 관념도 있다. 웨스트> 시마> 대화> 대화>
이런 가공의 인터뷰이가 늘어놓는 말이 저널리즘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이재현의 가상인터뷰 <대화> 는 가짜 저널리즘이다. 거기서, 불려나온 인터뷰이는 인터뷰어 이재현의 꼭두각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인터뷰이가 꼭두각시라는 것은 그가 인터뷰어의 의견을 고스란히 복제해낸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재현이 복화술사 노릇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어느 땐, 인터뷰이는 혐오스러운 몰골과 제스처로 인터뷰어와 맞섬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인터뷰어의 의견에 동조하게 만들기도 한다. 대화>
그렇다면 ‘가상’이 붙지 않는 인터뷰는 ‘진짜’ 저널리즘인가? 다시 말해 실재를 온전히 반영하는가? 그렇지 않다. 언어가 지닌 현실재현 능력의 한계나 기자의 편견(욕망) 때문에 기사라는 것 자체가(사실은 모든 장르의 글이) 현실을 일그러뜨리게 마련이지만, 인터뷰라는 형식은 특히 그렇다. 인터뷰는 취재형식 가운데 전형적인 의사사건인 데다가, 그것을 기사화하는 데는 거의 어김없이 재구성과 편집이 따르기 때문이다.
인터뷰 기사는, 흔히, 인터뷰이의 입을 빌려 인터뷰어의 의견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가상’이 아닌 인터뷰에서도 인터뷰이는 인터뷰어의 꼭두각시가 되기 십상이다. 가상인터뷰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의 인터뷰에서도 인터뷰이의 꼭두각시 노릇은 인터뷰어의 의견에 꼭 동조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자아내는 방식으로 인터뷰어와 대결함으로써 자신을 고립시키고 인터뷰어의 견해에 설득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가상인터뷰는 인터뷰라는 장르가 인터뷰어에게 베푸는 이런 상황통제의 권능을 극대화한 형식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터뷰이가 인터뷰어의 꼭두각시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의 그 꼭두각시 노릇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느냐다.
다시 말해, 인터뷰의 플롯을 짜내고 인터뷰이의 성격을 창조하는 인터뷰어의 ‘솜씨’다. 소설의 등장 인물들은 근원적으로 작가의 꼭두각시이지만, 뛰어난 작품 속에서는 그들이 자율적 인간으로 보인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터뷰든 가상인터뷰든, 독자(나 시청자)를 설득하고자 하는 인터뷰어는 자신의 인터뷰이에게서 꼭두각시 냄새를 말끔히 지워내려 애쓸 것이다.
이재현은 이 일에 성공했는가? 다시 말해 자신의 인터뷰이들을 자율적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는가? 마흔두 편의 <대화> 모두에서 그가 이 일에 성공한 것 같진 않다. 인터뷰어의 자기 주장은, 이따금, 그가 공들여 두른 겸손의 너울을 찢고 튀어나와 인터뷰이를 꼭두각시로 보이게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대화> 를 드라마의 공간이라기보다 논설의 마당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럴 때, 우리의 인터뷰어는 고전적 의미의 저널리스트라기보다 이데올로그로 보인다. 대화> 대화>
그런데도 가상인터뷰 <대화> 는 술술 읽혔고, 재미나게 읽혔다. 나만이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이 가상의 대화가 활자를 입는 화요일을 기다렸으리라. 그 이유는 크게 둘일 것이다. 첫째는 언어의 부력(浮力). 이재현은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경쾌하게 실어 나를 줄 안다. 이런 언어실천은 재주이기도 하고 취향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미덕일 수도 있고, 악덕일 수도 있다. <대화> 에서, 그 재주와 취향은 대체로 미덕 노릇을 한 듯하다. 대화> 대화>
그의 더듬이가 향하는 쟁점들은 흔히 너무 무거워, 그의 언어가 그리 경쾌하지 않았다면 쉽게 들여다보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세대 독자들에게도 넉넉한 소구력을 발휘할 이재현 언어의 부력에 떠밀려, <대화> 는 지표면의 논리적 윤리적 구성물을 넘어서 대기권의 여러 고도를 오르내리는 미적 구성물이 되었다. 그러니까 <대화> 의 미학을 낳은 것은 (무거운) 내용과 (가벼운) 형식 사이의 긴장 또는 어긋남이다. 대화> 대화>
둘째는 시의성. 장기(長期) 연재물의 필자는 체계의 유혹에 휘둘려 저널리즘(어원적으로 ‘나날의 기록’)의 현실구속에서 일탈하기 쉽다. 그러나 이재현은 <대화> 를 연재하면서 자신이 성실하고 유능한 저널리스트임을 입증했다. 그가 역사와 텍스트와 현실로부터 불러낸 사람과 사물과 관념들은 너무나 다양해 설핏 난데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가 그(것)들과 나누는 대화는 거의 어김없이 나날의 쟁점들과 밀착해 있었다. 대화>
(그러니, 나는 그가 저널리스트라기보다 이데올로그로 보일 때도 있었다는 말을 매우 조심스럽게 했어야 하리라. 또 가상인터뷰는 가짜저널리즘이라는 말도 거둬들여야 하리라.) 이를테면 그는 한국에서 미국이 지닌 의미를 캐기 위해 박정희, 밴 플리트, 사마천, 박현채, 피카소, 래리 킹 등 수많은 사람을 불러냈다. 그가 미국의 의미를 이렇게 거듭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지난 한 해 동안 한-미 자유무역 협정, 평택시 대추리의 미군기지, 전시작전 통제권 환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 이라크 주둔 한국군, 북한 핵, 영어 조기교육 같은 ‘미국 문제’들이 줄곧 한국을 옭아맸기 때문이다.
이재현이 수행한 <대화> 는 지금 이 곳의 문제를 두고 벌인 대화였다.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엿보기 위해 프랑스공화국의 상징 마리안느를 불러왔고, 일본의 우경화를 살피기 위해 일본 제국군대 장교 이시와라 간지와 좌익 테러리스트 에키다 유키코를 불러들였다. 대화>
그는 시애틀 추장과 경제학자 헨리 조지를 초대해 부동산 광풍을 입에 올렸고, ‘도박 도시’ 라스베이거스의 초석을 놓은 전설적 갱 벅시를 불러 ‘바다 이야기’를 이야기했으며, 축구공을 모셔서는 월드컵의 그늘을 함께 훔쳐보았다. 그래서, 한 편의 <대화> 를 다 읽고 나면, 그 날 그가 초대한 게스트가 바로 그 즈음의 ‘시사’를 실속있게 체현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화> 는 그러므로 골계와 기지와 반성의 언어로 쓰여진 2006년 시사연감이기도 하다. 대화> 대화>
이제 다시, 저널리스트 이재현이 아닌 이데올로그 이재현으로 돌아가자. 가상인터뷰 <대화> 에 임하는 이재현의 ‘정치적’ 입장은 뭐였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사마천과의 대화에서 털어놓은 ‘좌빠’일 것이다. 그는 사마천이 “자네는 좌파인가?”라고 묻자, “저는 ‘좌빠’에 불과해요. 진짜 좌파는 아니고 좌파를 좋아하는 쪽이지요. 거의 맹목적일 정도로요”라고 대답한다. 물론 이것은 별 뜻 없는 말놀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좌파’가 못되는 ‘좌빠’의 자임에선 조직적 실천에서 발을 뺀 독립지식인(고립지식인?)의 자의식과 겸연쩍음이 어슴푸레하게 읽힌다. 대화>
그 자신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에 사로잡혔던 1980년대라면, 이재현은 사마천의 물음에 떳떳이 그렇다고 대답했을 테다.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적 퇴각이 강요한 ‘반성’이 그를 ‘좌파’에서 ‘좌빠’로 ‘전향’시켰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전향’은 한 쪽 진영에서 다른 쪽 진영으로 넘어간 ‘진영간’ 전향이 아니라(이 ‘좌빠’는 좌파를 ‘맹목적일 정도로’ 좋아한다!), ‘운동’에서 ‘논평’으로 건너간 ‘층위간’ 전향이었다. 그 ‘좌빠’는 그가 다른 자리에서 다소 자조적으로 들먹인 ‘인디 좌파’와도 맥이 닿아있을 테다.
이 ‘좌빠’는 이제 더 이상 노동계급을 보편계급으로 여기진 않는 듯하지만, 여전히 소수파의 옹호자다. 정통 좌파라면 무심하거나 백안시했을 수도 있을 동성애자나 된장녀에게 그가 내보이는 ‘우애’는 ‘좌빠’의 계급감수성이 중층적이고 개방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 ‘좌빠’는 화려하지만 무모한 혁명의 기관차에서 내려, “지하와 지상을 들락거리며 당대의 흐름을 거슬러가다가 돌연히 출현하여 새로운 가능성들을 돌발적으로 제시하는”(다니엘 벤 사이드) ‘두더지’(제40회 <대화> 의 게스트)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잠재적 희망의 원리를, 저항과 전복의 전술을 모색(이 아니라면 몽상?)하는 듯하다. 대화>
객원논설위원 고종석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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