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원에 들렀다. 모두 반가워하는 분위기다. 마냥 웃는다. 그저 상금이 많이 걸렸다고 해서 짓는 미소가 아니다. 명인(名人)이라는 명칭이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사실 앞에 그냥 웃음이 나온단다. “뭔가 허전했지요. 이제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네요.”(조훈현)
명인전은 한국의 바둑을 이끌어 온 수레와 같다. 1969년 창설된 명인전은 국수전(1956) 왕위전(1966)과 함께 국내 최고(最古) 기전 중 하나다.
명인전은 30년이 넘는 오랜 전통을 지닌 기전답게 불꽃 튀는 승부와 명국의 향연으로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해 왔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972년 제4기 명인전 도전기에서 당시 서봉수 2단이 당대의 1인자 조남철 8단을 꺾고 명인에 오른 것은 가히 경천동지(驚天動地)할만한 대사건이었다.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바둑계에서는 한국 현대 바둑사에 남을 명승부 10장면 중 하나로 이 도전기 최종 승부를 꼽는데 이견이 없을 정도다. 서봉수 명인은 명인전에서 대회 5연패를 달성하며 팬들의 뇌리 속에 ‘서 명인’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서 명인은 이후 1인자 조훈현 9단과 그 유명한 ‘조-서 라이벌’ 시대를 열었으며, 그 주된 전장이 이곳 명인전 도전기였다.
90년대 들어 이창호가 ‘조-서 시대’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1991년 8연패 도전에 나선 스승 조훈현 9단을 꺾고 명인에 등극, 이른바 ‘제4세대’의 개막을 세상에 알렸다. 이창호는 91년 명인 획득과 함께 각종 기전서 맹위를 떨치며 지금까지 1인자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이창호 9단은 34기 명인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로 시작되는 35기 명인전에는 타이틀 홀더 제도가 없다. 대신 시드 배정을 받았다. 승부의 세계에서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명인전은 라이벌 기전으로 꼽히는 국수ㆍ왕위전이 우리나라에서만 개최되는 데 반해, 중국과 일본에서도 같은 이름(同名)의 기전이 개최되고 있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일본 명인전은 일본 서열 2위의 기전으로 이 기전에 대한 일본 바둑팬들의 애정과 존경심은 대단하다.
‘명인’지위는 일본 바둑계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는 거장을 뜻하며, 이는 우리나라의 ‘국수’와 비슷한 위상을 지닌다. 우리나라 역시‘명인’이라는 명칭을 바둑에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 활동하는 최상위 전문가에게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명인’이라는 브랜드가 지닌 힘은 한ㆍ중ㆍ일 공통의 것이다. 이는 곧 현재 세계 바둑계를 선도하고 있는 한ㆍ중ㆍ일 바둑 팬들에게 가장 친근하면서도 존경을 이끌어낼 수 있는 최상의 이름이라 해도 무방하다.
바둑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명인전’이라는 프로바둑대회가 있는 것을 알 정도로 명인전은 바둑계에 큰 영향력을 미쳐 온 기전이다. 비록 신설 기전들이 후발주자로서의 불리함을 만회하기 위해 엄청난 예산 규모와 우승상금을 내걸고 있지만, 명인전은 그들이 갖지 못한 오랜 전통과 브랜드의 무게로 인해 이미 많은 고정팬들을 확보해 놓은 상태다. 이젠 규모 면에서도 최강이 됐으니 그 이름이 당연히 값을 하게 될 것이다.
현재 세계 최강 한국바둑의 영광 속에는 명인전과 같은 국내 기전들의 헌신과 기여가 내재돼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바둑 팬들은 명인전이 대회를 유지하면서 가장 규모가 큰 국내 대회로 발전하길 바라고 있다. 한국 바둑이 정상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버팀목으로서 명인전이 그 역할을 다할 것으로 기대된다.
권오현 기자 koh@hk.co.kr
바둑 명인전 대국 어떻게 진행되나
국내 최대ㆍ최고 규모로 부활한 제35기 강원랜드배 명인전의 가장 큰 특징은 ‘진정한 승부’에 있다. 국내 최고의 절대 고수들이 겨루는 만큼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뜨거운 대국이 예상된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말이 걸맞다. 명인 타이틀 홀더 자체를 없앤 것이 그 증좌다. 편안하게 앉아서 도전자를 기다리는 상황이 아니다. 이창호 9단은 시드 배정만 받았지 명인 타이틀을 방어하는 입장이 아니다.
일단 사국(死局)의 요소를 없앤 것이 눈에 띤다. 기본 대국료가 섭섭하지 않게 나온다는 뜻이다. 예선 대국 추첨을 할 때 한국기원의 프로기사 랭킹이 참고가 된다. 2007년 1월 랭킹을 근거로 1위부터 36위까지를 배려해 조 편성을 한다. 한 편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기본이다.
예선을 거친 10명(이창호 명인을 제외하면 9명)이 풀 리그로 대결을 벌인다. 명인이 되지 않더라도 건지는 상금이 만만치 않다. 리그 1위는 1,700만 원, 2위는 1,400만 원이다. 리그 1위가 되어서 명인까지 된다면 1억1,700만 원의 상금을 챙기게 된다.
일단 예선을 통과한 9명은 대국 때마다 대국료를 받게 된다. 고정 수입이 생기는 것이다. 8, 9, 10위가 500만 원, 5, 6, 7위가 700만 원이다. 3, 4위는 1,000만 원을 받는다. 승자 수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일단 그 판에서 이기면 80만 원을 받는다. 지면 아무 것도 없다. 냉혹한 것 같지만 사국을 줄이고 이길 경우 흡족할 만큼의 상금을 줘 ‘한 판이라도 더 치열한’ 작품을 남긴다는 의미다.
리그 1, 2위를 하면 결승전을 치른다. 5번기다. 3번기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국내 최고 기전인만큼 승자를 가리는 데 더욱 신중하자는 의견이 더 우세했다.
권오현기자
바둑 명인전 최다 타이틀 보유자 조훈현
“무조건 반갑다고 해야 할까요?”
한국 바둑계의 거목 조훈현(53) 9단은 물어봐도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저 좋다는 뜻일 것이다.
“한국 바둑이 세계적으로 강세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잘 아는 것이죠. 그런데 올 한 해의 성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이나 일본의 반격이 만만치 않아요. 이런 상황에서 명성이 있는 국내 대회가 든든하게 내실을 다져서 부활한다고 하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조훈현 9단은 일명 ‘조 명인’으로 불린다. 서봉수 명인과 ‘조-서 라이벌’ 시대를 열었던 그는 1978년 서봉수 명인에게서 처음으로 명인 타이틀을 빼앗은 후 무려 12번이나 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1984년부터 1990년까지 7년 동안 명인전 최다 연패(連覇) 기록도 가지고 있다. 제자인 이창호 9단이 이후 타이틀을 독차지하다시피 했지만 1997년 스승에게 지는 바람에 연패 행진에서는 조 명인이 한 수 위다.
“한국 바둑의 대들보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상금 등 규모도 여느 다른 기전들이 흉내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요. 이미 후배들에게 많은 자리를 내 주고 있지만 명인전 만큼은 저도 욕심이 나네요. 한국의 바둑인들이 모두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입니다.”
이미 원로(?)로 대접받는 조 명인의 눈에서 전의가 불 타 오른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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