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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그날이 올 때까지

입력
2006.12.2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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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또 가는구나. 올해도 그날은 오지 않았다."

창 밖을 바라보던 S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담배를 한 대 물려다 불현듯 지난 주 온몸에 흘렀던 흥분이 되살아 났다.

"태국의 환투기 억제책 발표로 바트화와 주가가 폭락해 제2의 아시아 외환위기 우려로 금융시장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뉴스를 듣는 순간 무릎을 치며 '올 것이 왔구나'라고 소리 죽여 쾌재를 올렸다. 역시 정보수집에는 국제업무에 의탁하고 있는 것이 편리하다는 흡족함도 동반했다.

1997년 환란(換亂)과 시작이 같지 않은가. 안광(眼光)이 모니터를 뚫도록 컴퓨터를 붙들고 앉아 들여다봤다. 그러나 희망은 잠시 뿐, 한국 시장에의 영향은 거의 없었다. 허망했다.

북이 여름 미사일을 갈겨버렸을 때, 북이 가을 핵실험을 해치워버렸을 때도 혈관이 터져나갈 것 같은 흥분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날이 열리지는 않았다.

올 한 해 그날이 다가왔다는 흥분이 신경망을 달릴 때마다 해방정국의 농지개혁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 시절 농지처럼 지금 이 땅 모든 모순과 분란의 집약체인 아파트는 무상몰수-무상분배, 무상몰수-유상분배, 유상몰수-무상분배, 유상몰수-유상분배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터인데. 뭐가 적합할까….

이런 행복한 공상을 한동안 즐기도록 내버려 둘 만한 자비심조차 남지 않은 이 땅은 올 한 해 글자 그대로 부동(不動)이었다.

아시아 외환위기, 북의 핵ㆍ미사일 능력 등 외적 조건에 의존해 이 땅에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흥분하는 것 자체가 비과학적일지 모른다는 반성도 든다. 냄비의 물이 끓고 끓어서 뚜껑을 날려버리고, 수은주가 오르고 오르다 온도계를 깨버리듯이 내부 역량을 믿어야 한다.

자기모순의 폭발력을 믿어야 한다. 결국 붕괴의 기본원칙과 발단은 내파(內破)인 것이다. 파국의 결정 타격은 자체 동력으로 끌어내야 한다. 외적 조건은 어디까지나 보조 역량에 불과하다.

이 땅이 내뿜는 부동(不動)의 독기(毒氣)에 기죽거나 실망할 일은 아니다. 덩치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놈일수록 쓰러질 때 큰 소리가 나는 법이다. 게다가 한번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던가. 태양을 향해 날다가 날개가 타버려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그리스 신화는 아이들 논술시험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쉬운 이야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는 도약감은 상쾌하겠지만, 땅에 내릴 때의 착지감은 뛴 높이가 높을수록 고통에 가까워진다. 이런 걸 연착륙, 경착륙의 원리라고 했던가.

타워니 파크니 하늘로 치솟는 물건(物件)들, 이 허영의 도시도 언젠가는 무너져 내린 바벨탑 시리즈의 한 켠 각주에 찾아보기도 어려울 만치 초라하게 끼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모든 허영과 모순, 거품은 반드시 터진다는 것이 역사의 진리다.

새해에도 고난의 행군은 계속될 것이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내 생애에 그날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할지언정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생각의 끈이 툭 끊어졌다. 평소 S의 머리 속을 사찰해보겠다고 기웃거리는 자다. "당신 일심회지?"

대꾸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속으로 '자생적 무주택자야'라고 비웃어 주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짧게 구호를 외쳤다.

"부동산 거품 붕괴 만세!"

신윤석ㆍ국제부장 y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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