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방송인 빌 오릴리는 상류사회 체험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처음으로 돈 걱정 없는 사람들을 알고 나서의 일이다. <갑자기 친구 부르는 방법이 달라졌다.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에서 사귄 친구들은 대부분 중간 이름이 있었다. 스테판 트리스틴 코펜, 로빈 브래든 크로스필드 등 이름 모두를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다.>갑자기>
그들은 최고급 점잖은 옷을 입었고 윤 나는 차를 몰았다. 겨울 스키는 필수였다. 그들이 말하는 '작은 별장'은 북동부 해안에 있는 방 22개의 대저택이고, '캠프장'은 호숫가에 100년 넘은 저택이 있는 40 에이커의 땅을 의미했다. 그들은 나무랄 데 없이 예의 바르고,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의식적으로 우월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 대권주자와 유권자의 간극
오릴리는 아일랜드계 노동자 집안 출신이다. 그의 저서 '좋은 미국, 나쁜 미국, 멍청한 미국'은 두 차례의 에미상 보도부문상을 받은 그의 경력에 값한다. 이 책은 미국의 다양한 얼굴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칭찬도 하지만, 원색적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ㆍ하류사회를 대비시키는 '계급(class)'이 책 머리를 장식한 점이 이채롭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으로 채색된 미국사회가 공정함과 균형을 찾아가는 데 주요한 몫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념과잉의 거품이 꺼진 1990년대 이후 '계급'과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거의 멸종했다. 지금의 대선주자도 모두 중도다. 최근 한국일보가 정치노선과 이념(0은 대단히 진보적, 5는 중도, 10은 대단히 보수적)을 표시해 달라는 요청에 6명의 대선주자는 4와 5.5 사이에 있다고 대답했다. 한결같이 중도라고 밝힌 것은 자신을 '중도'라고 밝혀야 표를 모을 수 있다고 믿고, 차별화가 가져올 불이익을 피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세한 차이가 있다면 정동영씨가 4, 김근태씨가 4~4.5, 고건 손학규씨가 5, 이명박 박근혜씨가 5.5라고 답한 것이다. 유권자가 이념적 기준으로만 투표를 한다면, 대선주자들이 답한 1.5의 이념적 편차 안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시 한국일보 면접조사에 따르면, 유권자들의 성향은 이보다 다양하다. 자신을 '중도'라고 평가한 응답자가 45.1%로 가장 많기는 했으나 '진보'는 18.6%, '보수'는 36.3%였다.
대선주자와 유권자 간의 이념적 간극은 우리 사회의 실상과 허상을 보여 준다. 근래 진보가 줄고 중도가 늘어난 데는 보수 언론ㆍ정당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김대중ㆍ노무현정부의 이미지를 진보좌파, 친북반미 좌파 등으로 집요하게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진보를 혐오스런 이념처럼 만드는 데 성공한 듯하다. 그러나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사상이나 이념은 자유롭고 당당한 것이다.
● 중도 일색이 붕당주의 조장
극단으로 흘러 사회를 파괴하지 않는 한, 이념을 이유로 개인과 사회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대화나 선거로 상대를 설득하여 태도를 바꾸게 하거나, 반대로 설득 당하고 태도를 바꾸는 것이 민주주의다.
건강한 이념 경쟁에 의해 인류는 발전해 왔고, 그것이 막힌 독재ㆍ전체주의 아래서는 역사가 후퇴했다. 우리 사회는 거의 습관적으로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하고 있다. 이런 풍토 속에 사상의 자유가 위축되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는 데도 인색하게 된다.
대선주자들의 이념적 유사성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민주당 등의 태생적 근친성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위에 불인정의 편 가르기가 횡행할 때, 사람들은 중도로 몸을 가리게 된다. 물론 중도는 원만하고 현실적으로 편리한 점도 많다. 그러나 모두 중도를 외치기 때문에 활발한 정책정당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한사코 지역주의ㆍ붕당주의로 흐르는 것은 아닐까?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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