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9시30분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서울 도봉구 창동 자택 부근에 있는 서울외고 운동장에 들어섰다. 축구화에 운동복 차림이다.
예정보다 30분 가량 늦게 도착해서인지 약간 겸연쩍은 표정이었지만,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조기축구회 ‘파랑새’ 멤버들을 보자 특유의 너털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김 의장에게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다. “축구요? 골치 아픈 일들 다 잊고 땀 흘리며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으니 생각만 해도 신나죠.”
전날 지인들과의 망년 모임에서 과음한 탓인지 이날 김 의장은 한 골도 넣지 못했다. “평소보다 1시간 정도 더 잤는데도 여느 때보단 좀 힘들었다”고 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는데, 한 초등학생이 메모지를 건네며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김근태’라고 또박또박 쓰고 나서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21일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연설에 대한 소감을 묻자 김 의장은 “잘 들었다”고 짧게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김 의장은 굳은 표정으로 “대통령이 당을 도와야 한다”며 “청와대가 범여권의 정권 재창출에 기여하는 쪽으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노 대통령과는 방향과 노선이 비슷하지만 스타일에서 상당한 거리를 느낀다”면서도 “그러나 정치에서는 방향과 노선이 더 중요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노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정권창출에 기여한 지지자들의 결집을 통해 참여정부의 국정 철학을 계승ㆍ발전시키는 쪽으로 정계개편을 추진하겠다는 의중이 담겨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김 의장은 우리당이 버려야 할 기득권을 언급하면서 “여당이라는 것도 필요하다면 버려야 할 기득권”이라고 했다. 보기에 따라선 노 대통령에게 탈당을 요구하겠다는 얘기로 들릴 수 있는 얘기다.
자연스레 평화민주개혁세력의 대통합 얘기로 옮아갔다. 고건 전 총리에 대해선 반(反)한나라당 전선을 만드는 데 유력한 연대 대상이라면서도 고 전 총리가 최근 제시한 ‘가을햇볕정책’을 예로 들며 “(합치기 위해선) 논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 박원순 변호사, 강금실 전 법무장관,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등에 대해선 “이 분들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치권이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의장직을 언제까지 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그는 “자유롭고 싶은 생각과 책임감 사이에서 고민이 크다”고 했다. 2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적절한 시점에선 자유롭고 싶다는 쪽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것 같았다.
오후 들어 김 의장의 표정은 한결 밝아 보였다. 동네 어귀에 있는 근린공원에 나가 산책을 하는 동안에 만난 지역주민들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외식도 했다. 거리에서 만난 몇몇 시민들이 최근 우리당에서 추진중인 집값 안정 대책을 거론하면서 “고생하신다”, “집값 좀 잡아달라”고 하자, 김 의장은 “여당의 의장직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김 의장은 자신의 지지율이 미미하다는 얘기가 나오자 “국민은 현명하다”고 말했다. 낮은 지지율에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다. “참여정부와 우리당에 대한 국민적 실망을 생각하면 지금 지지율이 높은 게 이상한 일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간 국민들에게 ‘김근태는 이런 사람’이라는 걸 하나씩 보여주는 날이 올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양정대 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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