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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네거리의 뇌성마비 시인 정재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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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네거리의 뇌성마비 시인 정재완씨

입력
2006.12.24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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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는 무슨? 내가 쓴 건 그냥 낙서예요.”

24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 인도. 좌판을 펴고 쭈그려 앉아 있던 정재완(44)씨가 낡은 배낭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바닥에 펼치더니 뭔가를 끄적인다. 뒤틀린 손에 겨우 펜을 끼워 넣고 손에 입김을 불어 가며 삐뚤삐뚤한 모양으로 글자 하나하나에 힘주어 써내려 간다.

지나가다 간혹 발걸음을 멈추고 내려다 보던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정씨는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휴~”하고 큰 숨을 내쉬더니 씩 웃는다. ‘며칠 전까지 나무에 잎이 붙어있었는데 바람이 다 가지고 갔나. 잎이 얼마 붙어 있지 않다.’ 또 이렇게 시 한 편이 완성됐다.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인 정씨의 2, 3줄짜리 시에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작(詩作)에 대해 따로 배운 게 없다 보니 애써 꾸밀 실력도 없다. 그래서 그의 시는 늘 쉽고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정씨는 1995년 평소에 알고 지내던 다큐멘터리 감독 김우현(44)씨의 권유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4년 <광화문 연가> 라는 시집을 냈다. 하지만 계약금으로 50만원을 받았을 뿐 출판사가 바로 망하는 바람에 책은 절판됐다. 다행히 가수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씨가 그의 시에 멜로디를 붙여 음반 <날아간다고> 를 만들면서 정씨의 시는 감미로운 선율로 남게 됐다.

정씨는 시를 쓰는 이유를 묻자 겸연쩍게 웃었다. “집에 박혀 놀기 뭐해서요.” 그는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했다. 그런 자잘한 상념의 조각들은 시의 훌륭한 소재다. 하루 꼬박 소형액자와 음반을 팔아 1개월에 30만, 40만원을 버는 것이 고작인데도 그가 매일같이 거리로 나서는 이유다.

정씨는 점점 삭막하게 변해가는 사회 분위기가 안타깝다. 스케치북에는 ‘크리스마스 날이 다가오지만 옛날 만큼은 아니다. 예전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뭐가 불만인지 어두운 표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가을 도심집회 때는 무리 지어 행진하는 사람들을 보며 ‘밥그릇 싸움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이기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고 적었다.

스케치북 한쪽에는 ‘아저씨, 좋은 시 많이 써서 주위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 주세요’ ‘광화문 연가 2권도 꼭 내셔야죠’ 등 그를 성원하는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동네 가게 주인은 “정씨는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하는 훈훈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했다. 정씨는 대답 대신, 미리 적어 놓은 시를 보여주었다. ‘내 생각의 기준을 넘어 더 멀리 보는 눈을 갖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내년엔 돈 많이 벌고, 결혼할 여인을 사귀고, 외국에도 가보고 싶어요.”

글=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사진=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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