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격정적으로 민감한 발언을 쏟아놓은 데 대해 “대통령이 절제하지 못하고 막 나간 것 아니냐”는 비판이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공식회의석상에서 외교안보문제를 언급하면서 직설적이고 격한 표현들이 여과 없이 나온 것도 도마에 올랐다.
가장 큰 문제는 노 대통령의 말에선 자기 반성과 책임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다는 지적이다. 노 대통령은 언론과 일부 대선주자, 전직 국방장관과 예비역 장성들, 보수진영에 대한 불만 뿐 아니라 국민 수준까지 문제 삼았다. 하지만 지지율이 10%대인 본인의 국정운영 스타일이나 참여정부의 정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없었다. 선의를 갖고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개혁을 꾸준히 추진했는데 의도를 가진 세력에 의해 공격 받고 있다는 식의 주장이 대부분이었다.
노 대통령은 연설 전반부에 “신문 보고 나가서 참모들과 대화하면 자꾸 엇나간다”며 언론이 구미에 맞는 내용만 쓰거나 경중을 왜곡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미국 2사단의 후방 배치, 미군기지 반환 등 민감한 안보현안에 있어선 군 출신인사들과 보수진영에 대해 아예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참여정부 국정운영에 대한 비판에 대해 “모든 게 노무현 하는 것 반대하면 다 정의라는 것 아니냐”거나 “시어머니가 며느리 밥상 차려오는데 잔소리하려면 잔소리할 거리가 없겠느냐”고 한 데서도 본인의 책임은 없다. 오히려 상황을 본질을 지나치게 단순화, 호도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건 전 총리와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 정동영 전 의장 등 대선주자들에 대해 “실패한 인사”, “링컨 대통령의 포용인사와 비슷하게 하고 욕만 먹는다”고 말했다. 대선 개입 논란을 빚을 수 있는 말일 뿐더러 인사권자인 자신에게 누워서 침 뱉는 격이라는 얘기를 들을 만하다.
6자회담 와중에 비(非)외교적 어법으로 억측을 부를 수 있는 언급을 한 것도 적절치 못했다.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계좌 동결에 대해 “국무부가 재무부의 조치를 몰랐을 수도 있지만 나쁘게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비유한 게 단적인 예다.
“정부가 안보, 안보하면서 나팔을 계속 불어야 안심이 되는 국민의식”“2사단 빠지면 다 죽는다고 국민이 와들와들 사시나무처럼 떠는 나라” 등 국민을 폄하하는 발언들, “군대 가서 몇 년씩 썩는다”, “별 달고 거들먹거린다”는 군을 비하하고 자극하는 표현은 반감부터 불러일으킨다.
국민의 귀를 의심케 하는 어투도 많았다.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는다’‘약간 맛이 간 사람’‘우리 군인들이 떡 사먹었나’‘미국 바지가랑이에 매달려’‘불러다가 뺑뺑이 돌리고’‘수백명씩 잡아죽이고’‘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놈’ 등은 일국의 대통령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저는 제정신이다”는 말을 반복하며 “영 멍청하지 않으면 기왕 뽑았으니 국방ㆍ외교ㆍ안보ㆍ통일문제를 맡겨달라”고 했다. 그 동안 하던 대로 하겠다는 뜻이다.
양정대 기자 torch@hk.co.kr
노대통령 '거친 발언' 왜 나왔나
노무현 대통령의 21일 민주평통 발언 파장이 심상찮다. 고건 전 총리 등 당사자는 말 할 것도 없고 열에 아홉은 대통령의 거친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무슨 생각에 이런 발언을 쏟아냈을까. 대통령의 입을 통해, 그것도 공식석상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격렬하고 원색적이었던 탓에 일부에선 “우발적인 게 아니냐”고 할 정도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이날 예정보다 50분이나 더 많은 1시간10분 동안 전시작전권환수, 한미관계, 대북송금수사 등 외교 안보현안을 조목조목 짚었고 그때마다 메모지를 꺼냈다. 발언내용을 미리 준비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윤태영 대변인도 22일 “인사말씀이 예정돼 있어 주제에 대해 적어가신 것”이라며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 지난 4년간 한 것을 설명했다”라고 말했다. 윤 대변인은 “(대통령의) 표현을 갖고 뭐라고 하는 데 메시지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표현을 풍부하게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참여정부 외교안보정책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언급이었는데 말하는 도중 강도 높은 표현이 섞였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아울러 고 전 총리 관련 발언을 적극 진화했다. 윤 대변인은 “보수 진보를 아우르는 목적에서 한 인사가 실패했다는 의미이지, 고 전 총리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거나 인품이나 역량을 평가한 게 아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결국 최근 10%대를 맴도는 지지율 등 정치적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답답함이 ‘네 탓’이라는 특유의 오기와 뒤섞여 발언 도중 울분으로 폭발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노 대통령은 격정적으로 참여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지지 층에 도움을 청한 것 같다. ‘굴러온 돌’ 등 언급에선 자신을 소수자, 피해자로 규정해 전선을 형성하려는 의도도 읽힌다.
굳이 고 전 총리를 거론한 데서도 정치적 메시지가 감지된다. 범 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인 고 전 총리와 그를 한 축으로 하는 통합신당 창당 움직임에 대한 거부의사로 풀이된다. 그러나 발언 후 비등한 비판여론을 볼 때 노 대통령이 무슨 계산을 했다기 보다는, 특유의 스타일 때문에 속에 있던 말을 참지 못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동국 기자 east@hk.co.kr
'거친 발언'에 열 받은 전직 '별'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너무 황당하다.”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를 반대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강도높은 비난에 역대 국방장관 등 군 원로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이 매도당했다며 서운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특히 “군에 가서 (청춘을) 썩힌다”는 내용의 언급에 대해서는 현역 군인들 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22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향군회관에서 긴급회동을 가진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 관계자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공군참모총장 출신인 김상태 성우회장은 “대통령 발언에 착잡한 마음으로 밤잠을 설쳤다”며 “역대 장관들과 총장들이 작전권 행사를 못하고 별달고 거들먹거렸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표현”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낸 정진태 부회장은 “지금 단독으로 국방을 하는 나라는 아무도 없으며 전시 작전권도 유사시 한미가 합의를 통해 행사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의 주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병사들이 군에서 썩고온다는 노대통령 지적에 대해서도 불만들이 표출됐다. 한국국방연구원장을 지낸 송선용 성우회 사무총장(예비역 중장)은 “한마디로 충격적이다”며 “국민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는 만큼 역대 국방장관과 각군 총장 등의 의견을 모아 문제의 발언에 대한 해명을 하도록 준비할 것”이라고 밝혀 청와대 직접 해명 요구를 시사했다. 이와 관련해 현역군인들조차도 “군 막사를 현대화하고 내무실에 사이버 지식방을 개설하는 등 노력하고 있는데도 군통수권자 스스로 군복무를 폄훼하는 것은 지나친 것 아니냐”고 반발했다.
이상훈 전 국방장관은 “군 원로들이 국가안보를 우려한 충정에서 북한 핵문제가 해결될때까지 한미 연합사 해체를 전제로 한 전작권 환수 논의 중단을 촉구한 것이지, 대통령을 곤란하게 하거나 흔들려고 한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성우회 관계자들은 “군 원로들의 고언을 비하하는 듯한 대통령의 언급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오히려 대북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한데 대해 정부가 사과를 해야 한다”며 한결같이 불만을 터뜨렸다.
김정곤 기자 jkkim@hk.co.kr
분노한 고건, 盧대통령 정면 공격
신중한 행보를 보여온 고건 전 총리가 23일 성명서까지 발표하며 ‘고건 총리 기용은 실패한 인사였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전날 발언을 정면 반박했다. 성명 내용도 ‘자가당착, 자기부정, 오만과 독선’ 등 강경한 단어들로 채워졌다. 정치권은 “고 전 총리가 노 대통령 및 참여정부와 분명한 선긋기 및 차별화에 나선 것 같다”고 분석했다.
고 전 총리는 성명을 통해 “노 대통령이 국민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그것은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외면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들어 국정을 편 결과”라며 “노 대통령이 스스로 인정하는 ‘고립’은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편가르기, ‘나누기 정치’로 일관한 정치력 부재의 귀결”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성명 발표 후 서울 연지동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고 전 총리의 표정에는 노기가 남아 있었다. 성명 내용이 유례 없이 강경하다고 하자 고 전 총리는 “그런 것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사태를 맞아 권한대행으로서 국가 위기상황을 극복한 것에 대한 평가는 국민들의 몫”이라고 했다.
고 전 총리가 노 대통령과의 정면 승부를 택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참여정부의 초대 총리를 지냈다는 점 때문에 그동안 노 대통령에 대한 비판 수위를 조절해왔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정면 공격으로 고 전 총리도 그전보다는 홀가분한 입장에서 참여정부를 비판할 수 있게 됐다. 고 전 총리 캠프 내에서는 노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게 지지율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있다.
고 전 총리는 범여권의 정계개편 과정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여당의 신당파를 ‘지역주의 회귀자’로 매도한 노 대통령에게 더 이상 밀리면 안 된다고 판단한 듯하다.
다음은 고 전 총리와의 일문 일답.
-성명 내용이 강경하다.
“그런 것 아니다. 내가 늘 해오던 얘기 중에서 지금 상황에 맞는 말을 모은 것 뿐이다.”
-대통령이 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나.
“내가 좀 여쭤보고 싶다.”
-대통령 발언에 대해 국민들은 어떤 심정일 것 같나.
“국가 최고지도자의 언행은 정제되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대신하겠다.”
노 대통령 발언이 오히려 고 전 총리 지지율에 도움이 될 것이란 말도 있는데.
“………” (고개만 가로 저음)
신재연 기자 poet333@hk.co.kr
'노대통령 거친 발언'에 정치권 종일 술렁
여야 정치권은 22일 노무현 대통령의 전날 발언을 놓고 종일 술렁댔다.
열린우리당 통합신당파 의원들은 노 대통령의 발언을 정면 비판했다. 신당파의 한 의원은 “그나마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송두리째 접게 하는 깽판 발언들”이라며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김근태 의장계로 분류되는 우원식 의원은 “노 대통령이 정계개편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수순 같다”며 “하지만 파괴력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당파로 분류되는 정봉주 의원은 “신당파를 자꾸 흔들어서 내쫓으려고 하는 것”이라며 “중도개혁 세력을 묶으려고 하는 중심 인물들을 인신공격성 발언으로 공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친노로 분류되는 이화영 의원은 “고건 전 총리의 행보가 오락가락하고 참여정부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데 대한 적절한 의견 표명”이라며 “임기말이면 식물 상태에 처하는 과거 대통령 상에 대한 노 대통령의 저항”이라고 노 대통령을 변호했다.
열린우리당은 이날 공식 창구를 통해서는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일제히 침묵했다. 김근태 의장 등 지도부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심각한 표정만 지었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김 의장이 확대간부회의에서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려는 꼼수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두고 노 대통령과 친노그룹을 겨냥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한나라당은 “막말의 극치”, “궁예의 말로”등의 표현을 동원, 맹공했다.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조기 하야까지 생각해 작정하고 발언한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김형오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노 대통령이 또다시 막말을 자행했다”며 “마치 드라마 ‘왕건’에 나오는 궁예의 말로를 보는 듯 해 처연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다”고 말했다.
유기준 대변인은 “남 탓만 하는 그칠 줄 모르는 정열의 10분의 1만이라도 민생을 보살피는 데 쏟았더라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노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대선 새판짜기의 시동을 걸었다”며 “언론과 야당을 상대로 한 싸움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이제는 자신이 기용했던 전직 총리와 장관들에게까지 그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제2의 탄핵 유도성 발언”“지지자 결집을 위한 고도의 계산된 발언” 등의 다양한 해석도 나왔다. 한나라당 대선주자들도 발끈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대통령이 본인만 옳다고만 생각하는 독선적 리더십으로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대통령은 더 이상 정치에 개입하지 말고 자기 성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신재연기자 poet33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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