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도 국내 각 분야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많은 인사들이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 어느 해보다도 심각한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됐던 지난 1년. 오욕과 영광의 세월을 뒤로 하고 유명한 달리한 인사들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우리 현대사의 최단명 국가원수로 재임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이 10월22일 향년 87세로 세상을 떴다. 수년 전부터 심장병 등 노환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그는 자택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그에게 1979년 '10·26' '12·12'의 진실을 듣고 싶어했던 국민들의 바람도 함께 묻히고 말았다. 8개월 재임기간의 영욕과 그 후 30년 가까운 침묵은 그의 숙명이었을까. 간간이 '비망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의 타계로 79~80년 격동기의 진실은 영원히 역사의 뒤 페이지로 사라지게 됐다.
'1세대 외교관'으로 꼽히는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은 11월18일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 앞에는 '대한민국 제1호 해외유학생' '최연소 청와대 비서실장' '최연소 외무부장관' '국회 최초 전국구 4선 의원' 등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62년 청와대 비서실장, 64년 외무부장관에 올랐고 65년 한국 대표로 한ㆍ일협정에 조인했다.
국내 체육발전에 초석을 놓은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은 1월16일 88세로 타계했다. 그는 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체육회장에 올라 71년까지 체육회관과 태릉선수촌 건립에 앞장섰으며, 축구 육상 테니스 탁구 정구 등 5개 종목의 단체장을 맡기도 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신조로 별세 전날까지 테니스와 헬스를 즐겼다.
5공화국 시절 야당인 민주한국당 총재를 지낸 유치송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이 6월2일 82세로 숨졌고, 17대 현역 의원이던 열린우리당 구논회 의원은 11월15일 수술을 받았던 암이 재발해 46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떴다.
문화 예술계의 거목들도 많이 스러졌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는 1월29일 74세로 타계해 세계인을 아쉽게 했다. 갑부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58년 독일 유학을 계기로 세계 무대에 나섰다. 일찍이 텔레비전의 영향력에 주목한 고인은 "미래는 텔레비전 화면이 캔버스가 될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다양한 비디오설치 작업을 펼쳤고, "예술은 사기다"라는 발언으로 화제를 뿌렸다.
한국 사실주의 희곡에 큰 획을 그은 극작가 차범석씨는 6월6일 8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55년 등단해 60여편의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으며, 이념의 허구성과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산불> (1962)은 전후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대표는 "후배들을 야단치는 마지막 스승 "이라고 그를 회고했다. 산불>
'영원한 햄릿'으로 불렸던 원로 연극배우 김동원씨도 5월13일 90세로 운명했다. 1932년 연극 <고래> 로 데뷔한 고인은 51년 국내 초연된 <햄릿> 에서 주인공으로 열연했고, 94년까지 무려 300여편의 작품에 출연한 한국 연극계의 산증인이었다. 햄릿> 고래>
<머나먼 쏭바강> <우묵배미의 사랑> 등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은 소설가 박영한씨도 8월23일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우묵배미의> 머나먼>
인기 배우였던 부인 최은희씨와 함께 납북과 탈북을 거치며 파란만장한 영화인생을 살았던 신상옥 감독은 4월11일 80세로 타계했다. 그는 50년대 데뷔작 <악야> 를 시작으로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등 작품성과 흥행성을 고루 갖춘 작품으로 70년대까지 영화계를 이끌었으며, 북한에서도 1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그가 설립한 영화사 신필름은 제작ㆍ투자ㆍ배급을 아우르는 근대적 영화기업의 모태가 됐다. 부부가 함께 안양예고를 세워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상록수> 사랑방> 성춘향> 악야>
80년 데뷔 이래 시사풍자 개그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개그맨 김형곤씨는 3월11일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다 갑작스럽게 숨을 거뒀다. 46세의 아까운 나이에 느닷없이 맞은 죽음이어서 팬들의 충격도 컸다. 그는 5공화국 시절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등에서 날카로운 풍자로 인기를 모았다.
가요 영화 드라마 코미디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던 배우 김상국씨는 10월15일 72세의 나이로,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의 가수 신카나리아씨는 11월4일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9단은 7월2일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41년 한국인 프로 기사 1호로 바둑 인생을 연 고인은 조훈현 조치훈씨를 일본에 유학 보내 바둑강국의 기틀을 쌓았다.
5월22일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국가적 손실이기도 했다. 한국인 최초로 유엔 전문기구의 선출직 사무총장 자리에 올랐던 이 박사는 집무 도중 쓰러져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23년간 WHO에서만 근무한 그는 에이즈와 결핵 등 질병 퇴치와 예방, 세계 각국의 보건의료행정 지원 등 전 세계인의 건강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재야운동의 대부이자 5·18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었던 인권변호사 홍남순씨는 10월14일 94세로 타계했다. 판사 생활을 거쳐 63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60건 이상의 양심수 재판을 무료 변론했고,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내란수괴 혐의로 신군부에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뒤 1년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개신교계 원로인 강원용 목사는 8월17일 89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설립해 종교간 대화와 인간화·생명운동을 펼쳤고 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섰다. 2000년에는 평화포럼을 만들어 한반도 평화와 통일운동에 이바지하는 것을 생의 마지막 소명으로 여기며 헌신했다.
학계와 언론계에서도 많은 별들이 졌다. 60년대 '사상계' 편집장을 역임한 사회철학자 신일철 고려대 명예교수가 1월16일 76세로 별세했고, 국어학계의 원로 안병희 서울대 명예교수도 10월24일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명칼럼니스트이자 방송위원장을 역임한 김창열 전 한국일보 사장과 '이규태 코너'를 23년간 연재했던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 한국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낸 정달영씨도 올해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도 휠체어에 탄 모습으로 강한 인상을 줬던 '박치기왕' 김일씨는 10월26일 77년 만에 인생의 링을 내려왔다. 67년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등 60, 70년대 고달픈 국민들에게 대리만족을 준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9월9일 4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이민우씨는 80년대 한국 역도의 간판스타이자 씨름선수였다. 최근 폐막된 도하아시안게임에서는 승마대표팀의 김형칠(47)씨가 경기 도중 낙마사고로 숨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TV드라마 <왕초> 의 실제 주인공인 '거지왕' 김춘삼씨는 11월26일 78세를 일기로, 94년 한국전쟁 국군포로 가운데 처음으로 북한을 탈출해 43년 만에 남한으로 귀환했던 조창호 예비역 중위는 11월19일 76세로 숨졌다. 왕초>
한국경제의 산증인들도 하나 둘 스러졌다. 국내 중공업 발전에 초석을 다진 정인영 한라건설 명예회장이 7월20일 86세로 타계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바로 아랫동생인 그는 4전5기의 주인공이자 '부도옹'(不倒翁·오뚝이)으로 불렸다. 80년 현대양행 창원공장(현 두산중공업)을 강제로 정부에 넘겨주고 건강이 나빠져 87년 중풍으로 쓰러졌지만, 90년대 들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사업을 확장해 한때 한라그룹을 재계 12위로 끌어올렸다. 외환위기 때는 부도의 아픔도 겪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부친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은 11월24일 80세로 눈을 감았다. 한국 해운업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해 '해운업계의 거목'으로 평가 받았다.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 조중훈 회장의 셋째 아들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도 11월26일 53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5월22일 82세로 타계한 이강학 고려통상 명예회장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치안총수인 경찰국장 자리에 올랐으나 3·15 부정선거를 주도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4년을 복역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포목장사로 돈을 번 뒤 원양어업과 금융사업으로 재기에 성공해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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