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내전적 형태의 국제전"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있는 한국관련 자료만 160만~180만 건이에요. 1990년대에 공개된 신노획 문서도 100여 상자 분량이죠. 하루 종일 뒤져서 공치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 오래된 문서고에서 2년 가량을 살다시피 하며 “땀으로” 쓰여진 책이 목포대 정병준(역사문화학부) 교수의 저서 <한국전쟁> 이다. 그는 “그렇게 찾아낸 단편적인 자료들이 다른 자료와 소통하고 또 다른 자료가 개입하는 순간의 감격은 거의 ‘무아지경’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그의 저서는 한국전쟁에 관한한 ‘아성’이랄 수 있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들> 을 자료의 힘으로 넘어선 역저로 평가 받았다. “커밍스가 참고한 자료는 80년대 구 소련이 선별적으로 공개한 문서와 미국 자료, 영역된 일부 북한자료였습니다. 90년대의 신노획 문서는 검토하지 못했죠.” 한국전쟁의>
그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학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2001년과 05년 NARA에서 2년의 연구 기간을 얻었고, 특정 이론이나 가설, 방법론에 의하지 않고 오직 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구소련의 괴뢰인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고 보는 ‘전통주의’나 내전이라는 전제 하에 미ㆍ소의 책임을 따진 커밍스 등의 ‘수정주의’와 달리 저는 한국전쟁을 ‘내전적 형태의 국제전’이라고 봅니다.” 빨치산 활동이 전투경험의 전부인, 요컨대 연대급 야전부대 이상을 지휘할 능력이 없는 북한군 지휘부가 10개 사단 규모의 통합작전 계획을 수립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북한군의 작전계획은 2차대전에 참전한 스탈린의 고급 군사참모들에 의해 소련어로 작성된 후 한글로 번역됐고, 소련 군사고문단까지 전선에 동원됐어요.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작전권이 조중연합사령부 펑더화이(彭德懷)에게 주어진 것도 그 맥락에서입니다. 한국군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에 있었던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요.”
70년대 인도 학자(굽타)가 제기해 여전히 그 불씨가 남아있는 ‘남침 유도설’, 그리고 이를 받치는 논거인 개전 직후 한국군의 ‘해주 점령설’의 허술함도 사료를 통해 비교적 선명히 해명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돌출적 사건이 아니라 남북ㆍ미소ㆍ좌우의 힘이 충돌하고 반응하며 ‘형성’된 것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다.
그는 이국의 서고에서 50년간 침묵하던 자료들을 보고 콧날이 시큰거리던 순간들을 기억한다고 했다. “피 묻은 병사수첩, 포탄 파편에 찢긴 명령서철, 전사통지서, 심지어 비목(碑木)까지 있었어요.” 그는 앞으로 전쟁 기간 중 남북한 사람들의 삶, 즉 농지개혁이나 인민위원회 치하의 일상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들을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심사평] "전쟁 발발 원인 등 규명위해 땀흘려 쓴 노작"
역사학에서 '진실'을 가리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손발이다. 어떤 그럴듯한 주장도 '사실'의 반박을 넘지 못하면 공상이 되고 만다. <한국전쟁> 은 '역사적 진실'이라는 말에 값하기 위해 저자가 정말 많은 땀을 흘렸음을 짐작케 하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전쟁 발발의 진실을 캐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미국, 구소련, 북한 문서들을 검토했다. 그는 출처가 다른 자료들을 서로 교차 분석함으로써 주장들을 검토하고 사실들을 확인했다. 한국전쟁>
역사 연구가 대개 그렇지만,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자료는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다. 어떤 자료에 근거했느냐에 따라 전쟁의 원인이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전통주의, 수정주의, 신전통주의 등 한국전쟁에 관한 주요 이론들이 출현할 때마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자료의 공개가 있었다. <한국전쟁> 은 근래에 공개된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기존 연구들이 자료의 제약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계들을 상당 부분 극복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을 특정 시점에 특정 세력이 일으킨 사건으로 보지 않고, 미소·남북·좌우의 대립과 길항과정에서 '자라난' 것으로 바로 보는 시각, 즉 '한국전쟁의 기원'을 '한국전쟁의 형성'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흥미롭다. 한국전쟁>
연구ㆍ생활코뮨 <수유+너머> 고병권 대표 수유+너머>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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