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역 배제 학술서적 번역 신모델 제시
독일 철학자 칸트(1724~1804)를 흔히 ‘서양철학의 저수지’라고 비유한다. 그리스ㆍ로마 철학, 기독교 사상, 수학적 자연과학 등이 칸트 철학에서 합쳐졌다가 다시 여러 학파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를 추종하거나 비판하면서 철학을 할 수는 있어도 칸트를 모르고는 철학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의 대표작 <순수이성비판> 이 여러 번 한글로 번역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순수이성비판>
백종현(56)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번역본(아카넷 발행)은 그 중 가장 최근작이다. 그는 1975년 박사 과정에 들어가면서 칸트 철학을 시작해 30년 이상 이 분야에 매달려온 칸트 전문가다.
이전 번역본은 일본어로 된 2차 문헌을 바탕으로 한 것이 많지만, 그의 <순수이성비판> 은 독일어 원전을 직접 옮긴 것이다. 각지(覺知), 오성(悟性)처럼 이전 번역본에 나오는 일본식 단어를 포착, 지성 등으로 바꾼 것도 원전을 옮겼기 때문이다. 백종현 번역본의 또 다른 특징은 풍부한 주석이다. <순수이성비판> 에 나오는 구절이 어디에서 인용됐는지를 일일이 확인해 주석을 붙였다. 순수이성비판> 순수이성비판>
백 교수는 “인간의 이성을 과대평가한 초기 계몽주의의 오류를 지적하고,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가치의 존재를 알리는 책”이라고 <순수이성비판> 을 평가했다. 이 책을 독일어로 썼다는 것도 의미가 크다. 당시 독일 지식인이 라틴어로 책을 썼기 때문에 라틴어를 모르는 민중은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따라서 독일어로 책을 쓴 것은 지식의 독점 체제를 깨고, 지식의 공유 체제를 형성하는 시발이 됐다. 순수이성비판>
백 교수는 “학술 번역의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한다. 교수, 전공자 등 전문가가 원전을 대신해 읽을 수 있도록 의역을 배제하고 100% 직역했다는 것이다. 칸트가 틀리게 쓴 것은 틀리게 번역하고(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은 주에서 별도로 표시했다), 칸트가 라틴어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한자로 표기해 고어 분위기를 살렸다. 그의 번역본을 누군가 나중에 독일어로 다시 옮길 경우, 원전과 달라지지 않을까 걱정했고 이를 막기 위해 책에 ‘유사어 및 상관어 대응 번역어표’ 등을 두어 독일어 단어와 그것이 옮겨진 한글 단어를 일목요연하게 표기하기도 했다.
백 교수의 번역이 86년 시작됐으니 결실을 맺는데 20년이 걸렸다. 시간의 길이가 그렇듯, 원고지 4,000여 매의 방대한 분량이 그렇듯, 번역에 많은 공력이 들어간 책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사진=원유헌기자 youhone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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