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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현의 영화로 보는 세상] <중천>에서만 인간의 악취 씻어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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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현의 영화로 보는 세상] <중천>에서만 인간의 악취 씻어내야 할까

입력
2006.12.2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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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사람이 죽고 나면, 49일째 되는 날에 '재(齋)'를 올린다. '49재'는 망자를 위로하는 제사가 아니다. 죽은 자가 불법(佛法)을 깨달아 다음 세상에서는 좋은 곳에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길 비는 '깨끗하고 큰 의식'이기에 '재(齋)'라고 한다.

'49재'는 불교의 윤회설에 근거한다. 이승에서의 한번의 삶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소멸하지 않고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믿음. 기독교의 '영원한 삶'과 '부활'과도 같은 이 믿음은 어쩌면 죽음이란 운명 앞에 놓인 인간의 몸부림이자, 환상인지도 모른다. 죽음 이후의 것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쓴 신경학 전문의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의 말을 빌면 '경험과학 즉 경험주의는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끝없이 영혼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종교 역시 영혼에 대한 인간의 믿음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런 영혼에 대한 가설과 상상과 믿음을 통해 인간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생명의 유한성'을 부정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고, 죽음 그 자체를 하나의 통과제의로 받아들이려는 자세일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런 믿음을 통해 이승에서 보다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설정한 사후의 천당이나 지옥도 이승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구하려는 역설인 셈이다. 어느 종교 할 것 없이 인간은 자기가 지은 평생의 업보대로 영혼의 세계, 윤회가 결정된다는 원칙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육도, 즉 천상 인간 축생 아수라 아귀 지옥도 중 어느 것을 만날 것인가는 결국 자신에게 달려 있다.

단지 이 뿐이라면, 너무나 가혹하지 않는가. 후회하고 깨달은들 무슨 소용이 있나. 종교적 '구원'이니 '속죄'니 하는 말도 애당초 필요 없지 않은가. 살아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마지막으로 한번의 기회는 주자. 그게 없다면 종교의 가장 큰 정신의 하나인 '용서'가 무의미한 것 아닌가. '49재'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 모른다. 죽은 자의 육체에서 빠져 나온 영혼에게 주어지는 49일. 다음 생이 결정되는 '중음(中陰)'이라는 이 시간에 산 자와 죽은 자가 빌고, 뉘우치고 깨닫는다면 보다 나은 세계로 갈 수 있다.

그 중음신들이 49일 동안 머무는 곳을 조동오 감독의 영화 <중천> 은 '중천(中天)'이라고 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죽은 자의 영혼들이 환생을 준비하는, 기독교에서 인간이 죄를 완전히 씻지 못하고 죽어 머무는 연옥 같은 곳이다.

영화 <중천> 는 어느날 자신을 대신해 죽은 사랑하는 연인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던 신라시대 퇴마무사인 처용대의 이곽(정우성)이 자신의 동료였던 원귀들의 반란으로 깨져버린 결계(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를 통해 중천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자신을 대신해 억울하게 죽은 연인을 만난 그는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천인이 된 소화(김태희)와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아파하면서, 윈귀가 돼 복수를 위해 이승 문을 여는 열쇠인 영체를 가진 소화를 노리는 옛 동료와 처용대 대장 반추(허준호)에 맞서는 이야기다.

영화는 중천을 이렇게 상상했다. 역시 죽은 영혼으로 하늘의 사람이 된 천인(天人)이 영혼들을 천상으로 보내기 위해 교육하고 관리한다. 그곳에는 이승에서 냄새를 모두 지우는 탄취탕이 있고, 이승에서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는 자명경이 있으며, 가장 잘못한 일을 뉘우친 후에야 들어갈 수 있는 참선마을이 있다. 이것을 모두 마치면 환생을 위해 죽은 자는 천상에 오를 수 있다.

처음 살아있는 몸으로 중천에 들어온 이곽에게 한 죽은 영혼이 인간의 악취가 풍긴다면 코를 감싼다. 그 냄새를 없애기 위해 이곽 역시 탄취탕에 들어간다. 그 냄새란 다름아닌 속세의 더러움일 것이다. 욕망과 거짓, 번뇌와 분노, 시기와 질투로 더럽혀진 인간의 냄새. 지워버려야 할 기억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비슷한 상상으로 만든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와는 정반대다. <원더풀 라이프> 는 중천을 기억을 지우는 공간이 아닌 '기억의 공간'으로 설정했다. 영혼들에게 생전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 하나를 선택해 천국으로 가도록 했다. 그 기억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타인을 용서하고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도록 한다.

기억이란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스 부뉴엘은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다. 그런데 <중천> 은 왜 기억을 지우라고 할까. 이승에서의 미련을 버리라고? 그 뿐일까. 인간은 <원더풀 라이프> 처럼 죽어서도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기보다는 상처의 기억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천상에서까지 용서와 속죄 보다는 미움과 복수를 생각할 게 틀림없다.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적개심으로 가득 차 칼날처럼 상대를 찌르는 그들의 기억과 냄새를 없앨 탄취탕과 자명경이 중천이 아닌 지금 여기에도 있었으면.

이대현 편지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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