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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한국출판문화상

입력
2006.12.22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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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한국출판문화상 부문별 수상작이 결정됐습니다. 우리가 이들의 성취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지혜와 열정의 결실이면서 우리 출판의 시금석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이들을 치하하는 것은 과정의 땀방울 때문만이 아니라 이 결실들이 다시 우리 출판의 터전을 비옥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상자와 심사위원들의 이야기를 나눠 듣습니다.

◆심사위원 ▦본심: 정병규 정디자인 대표, 이동철 용인대 교수, 허병두 '책따세' 대표, 이권우 도서평론가, 고병권 '수유+너머'대표 ▦예심: 이동철 교수, 허병두 대표, 이권우씨,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표정훈 도서평론가 ▦백상특별상 심사위원: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장명수 한국일보사 이사, 송영만 효형출판 대표

특별상 - 한국문화복지協 이중한 회장

“책의 예언자이자 60~70년대 한국 출판의 지휘자입니다. 지금 한국 출판의 주역들 가운데 그의 영향을 받지않은 이는 없을 겁니다. 한 마디로 책의 수호천사입니다.”- 파주출판문화재단 이기웅(열화당 대표) 이사장.

“사실상 한국 최초의 출판 평론가이고, 어렵던 시절에 한국 출판의 진로와 방향을 포괄적으로 고민하고 지원한 공로자죠.” 대한출판문화협회 박맹호(민음사 회장) 회장.

“대단한 장서가이자 애서가입니다. 80, 90년대에는 문화정책에도 간여하시며 문화행정 전반의 장기 지원계획 수립의 주춧돌을 놓으셨어요.”- 서울대 김문환(미학) 교수

“잡지면 잡지, 신문이면 신문…, 아무튼 선구적인 출판 기획ㆍ편집인이었어요.” 남재희 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한국문화복지협의회 이중한(李重漢ㆍ68) 회장. 그가 제47회 한국출판문화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1960년대 월간 <자유공론> <세대> 편집장을 거쳐 70년대 초 <독서신문> 편집장, 서울신문 주간 <서울평론> 과 문화부 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이런저런 문화단체 일을 찾아 다니며 출판 발전과 문화 행정 등 분야에서 눈에 띄는 업적들을 쌓아왔다.

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그 굵직굵직한 이력과 성과보다 그의 일상과 숨은 활동에 더 주목한다. 그는 기호품으로서가 아니라 책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고 아낀 애서가로 기억된다. “장서가 적어도 5만 권은 될 겁니다.

시집이며 잡지 초판본을 구하느라 일삼아 고서점을 다니던 기억이 새롭네요.”(남재희 전 장관) “저랑 둘이서 <출판저널> 을 창간했는데, 편집회의 하자고 모여보면 우리는 처음 보는 신간도 그는 이미 다 읽고 와 앉아있어요.(이기웅 이사장) 이 회장의 장녀 주희(41)씨는 “귀한 책이 많다는 얘긴 들었는데 들춰볼 엄두를 못 냈고 정리할 공간도 없어, 뭐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저희가 어릴 땐 서재를 늘 잠가두고 다니셨어요. 다 커서도 책을 보겠다고 하면 당신 책은 두고 따로 한 권을 사 주실 정도였죠.” 책에 얽힌 일화를 묻자 그는 그 말 끝에 “말도 못한다”며 웃었다.

이기웅 이사장은 파주북시티의 공로도 그에게 돌렸다. “18년쯤 전입니다. 출판도시 건립을 테마로 심포지엄을 연 적이 있는데, 이 회장이 발표한 주제가 ‘박물관으로서의 출판도시’였어요. 박제된 유물 전시 공간으로서의 박물관도시가 아니라, 책의 양상과 성취를 끌어안고 미래의 상을 그리며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으로서의 책 마을이었지요. 출판도시를 조성하는 동안 그의 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그는 2004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져, 2년 넘게 의식을 놓은 채 지금껏 병석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발병 직후 이기웅 이사장은, 수목장(樹木葬)을 원하는 가족의 뜻에 따라 파주북시티 볕 좋은 마당의 아담한 버드나무 한 그루를 봐뒀다고 한다. 그는 “하지만 18년 전 그렸던 출판도시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가꿔졌는지 그가 직접, 건강한 모습으로 보러 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학술부문 - '한국전쟁' 정병준씨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있는 한국관련 자료만 160만~180만 건이에요. 1990년대에 공개된 신노획 문서도 100여 상자 분량이죠. 하루 종일 뒤져서 공치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 오래된 문서고에서 2년 가량을 살다시피 하며 “땀으로” 쓰여진 책이 목포대 정병준(역사문화학부) 교수의 저서 <한국전쟁> 이다. 그는 “그렇게 찾아낸 단편적인 자료들이 다른 자료와 소통하고 또 다른 자료가 개입하는 순간의 감격은 거의 ‘무아지경’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저서는 한국전쟁에 관한한 ‘아성’이랄 수 있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들> 을 자료의 힘으로 넘어선 역저로 평가 받았다. “커밍스가 참고한 자료는 80년대 구 소련이 선별적으로 공개한 문서와 미국 자료, 영역된 일부 북한자료였습니다. 90년대의 신노획 문서는 검토하지 못했죠.”

그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학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2001년과 05년 NARA에서 2년의 연구 기간을 얻었고, 특정 이론이나 가설, 방법론에 의하지 않고 오직 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구소련의 괴뢰인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고 보는 ‘전통주의’나 내전이라는 전제 하에 미ㆍ소의 책임을 따진 커밍스 등의 ‘수정주의’와 달리 저는 한국전쟁을 ‘내전적 형태의 국제전’이라고 봅니다.” 빨치산 활동이 전투경험의 전부인, 요컨대 연대급 야전부대 이상을 지휘할 능력이 없는 북한군 지휘부가 10개 사단 규모의 통합작전 계획을 수립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북한군의 작전계획은 2차대전에 참전한 스탈린의 고급 군사참모들에 의해 소련어로 작성된 후 한글로 번역됐고, 소련 군사고문단까지 전선에 동원됐어요.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작전권이 조중연합사령부 펑더화이(彭德懷)에게 주어진 것도 그 맥락에서입니다. 한국군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에 있었던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요.”

70년대 인도 학자(굽타)가 제기해 여전히 그 불씨가 남아있는 ‘남침 유도설’, 그리고 이를 받치는 논거인 개전 직후 한국군의 ‘해주 점령설’의 허술함도 사료를 통해 비교적 선명히 해명한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돌출적 사건이 아니라 남북ㆍ미소ㆍ좌우의 힘이 충돌하고 반응하며 ‘형성’된 것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다.

그는 이국의 서고에서 50년간 침묵하던 자료들을 보고 콧날이 시큰거리던 순간들을 기억한다고 했다. “피 묻은 병사수첩, 포탄 파편에 찢긴 명령서철, 전사통지서, 심지어 비목(碑木)까지 있었어요.” 그는 앞으로 전쟁 기간 중 남북한 사람들의 삶, 즉 농지개혁이나 인민위원회 치하의 일상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들을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심사평] "전쟁 발발 원인 등 규명위해 땀흘려 쓴 노작"

역사학에서 '진실'을 가리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손발이다. 어떤 그럴듯한 주장도 '사실'의 반박을 넘지 못하면 공상이 되고 만다. <한국전쟁> 은 '역사적 진실'이라는 말에 값하기 위해 저자가 정말 많은 땀을 흘렸음을 짐작케 하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전쟁 발발의 진실을 캐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미국, 구소련, 북한 문서들을 검토했다. 그는 출처가 다른 자료들을 서로 교차 분석함으로써 주장들을 검토하고 사실들을 확인했다.

역사 연구가 대개 그렇지만,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자료는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다. 어떤 자료에 근거했느냐에 따라 전쟁의 원인이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전통주의, 수정주의, 신전통주의 등 한국전쟁에 관한 주요 이론들이 출현할 때마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자료의 공개가 있었다. <한국전쟁> 은 근래에 공개된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기존 연구들이 자료의 제약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계들을 상당 부분 극복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을 특정 시점에 특정 세력이 일으킨 사건으로 보지 않고, 미소·남북·좌우의 대립과 길항과정에서 '자라난' 것으로 바로 보는 시각, 즉 '한국전쟁의 기원'을 '한국전쟁의 형성'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흥미롭다.

연구ㆍ생활코뮨 <수유+너머> 고병권 대표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교양부문 - '미래교양사전' 이인식씨

<미래교양사전> 은 과학서로는 드물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한국인은 과학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은데다 역사, 신화 등 과거에 관한 책을 즐겨 읽기 때문에 저자 이인식(61) 과학문화연구소장조차 수상을 의외로 생각할 정도다. 그렇지만 책을 펼치면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알아야 할 내용이 눈에 확 들어온다.

<미래교양사전> 에는 가상인간에서 흡혈박쥐까지 369개 항목에 대한 설명이 사전식으로 나열돼 있다. ‘내가 모르면 독자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서, 저자는 자신에게 낯선 것을 우선 골랐다. 다시 이를 분야별로 안배했더니 과학 기술이 중심이 됐고 경제, 문화, 정치, 환경 등으로 뻗어나갔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배할 핵심 키워드”라고 이들 항목을 소개했다.

항목 설명은, 이 소장이 평소 모아두었던 국내외 신문, 잡지, 단행본과 인터넷 등을 뒤져 붙였다. 특히 이코노미스트, 포브스 등 해외 경제 전문지는 과학기술과 경제를 접목한 자료가 많아 큰 도움이 됐다.

저자는 <미래교양사전> 의 성격을 대한민국의 젊은 엘리트가 알아야 할 미래 과학 지식의 모음으로 규정했다. 이처럼 미래를 거듭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앞날을 지금 준비하면, 미래의 오류를 훨씬 줄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연해서 표현하면 이렇다. “삐끗해서 지금 1도가 벌어지면 나중에는 그 각도가 100도로 혹은 그 이상 확대돼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 보고 지금 최선을 다하자는 것인데 그러자면 미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소장은 이 책이 한번 나온 데서 그치지 않고 판을 바꿔가며 출판을 거듭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과학적 성과나 새로운 발견, 발명, 흐름 등을 모아 3년에 한번씩 내용을 보완해 업데이트 하겠다는 것이다. 사후에라도 누군가가 작업을 승계해 항목을 추가하면서 이 책을 대한민국의 대표적 과학서로 키워나간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한다.

이 소장은 40대 후반에 대기업을 박차고 나온, 국내의 대표적인 과학 전문 저술가다. 직장인의 미래에 회의를 품고 있던 중 전공인 공학과 젊은 시절 소설을 낸 글 솜씨를 결합시켜 이 일에 나섰다. 1987년 <하이테크 혁명> 을 시작으로 <미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 <아주 특별한 과학에세이> 등 여러 권의 책을 내고 번역했으며 신문 잡지의 과학 분야 기고자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심사평 - "미처 보지 못한 것들 새롭게 인식하게"

교양 부문에서는 올해 들어 각 분야의 주요 개념어를 알기 쉽게 풀어낸 '사전'류가 많이 출판됐다. 이 사실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다른 무엇보다 그런 책을 써낼 수 있는 필자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기실, 우리 출판은 필자 기근 현상에 시달려 왔다. 기획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만한 필자가 없어서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해당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대중들이 얼마든지 읽어낼 수 있는 필력이 있어야 가능한 사전류가 이처럼 다양하게 나왔으니, 우리 필자군도 어지간히 넉넉해지고 두터워졌다 아니 할 수 없게 됐다.

교양서로 우리가 뜨겁게 논의한 것은 서경식, 주강현, 강신주의 책이다. 이들 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보지 못한 것을 새롭게 인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책들이나 수상의 영광은 이인식의 <미래교양사전> 에 돌리기로 했다.

올해 유난히 많이 나온 사전류 책에 대한 평가와, 그 가운데 가장 성취도가 높은 책을 고려한 결과다. 과학저술가 1세대로 활동한 이인식 씨에게는 '상복'이 너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이 상이 그를 크게 기쁘게 했으면 좋겠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박광희기자 khpark@hk.co.kr사진 김주성기자 poem@hk.co.kr

편집부문 - '조선통신사 사행기록 시리즈' 이혜순씨

“주요 고전 하나가 번역되면 새로운 연구영역이 열립니다.”

조선통신사 사행기록 시리즈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부사산 비파호를 날듯이 건너>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조선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의 번역을 기획ㆍ감수한 이화여대 이혜순(국문) 교수는 18세기, 특히 12차례 조선통신사행 가운데 사실상 마지막 사행이었던 1763년 계미사행(癸未使行)의 사회사적ㆍ문학사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에 대해 낮춰보는 조선통신사들의 시각이 그 즈음 균형감각을 찾기 시작해요. 진정한 토론이 이뤄지고 일본 실용문화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죠. 정사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오고, 수차(水車) 그림을 그려오는 것도 그 때죠.”

조선 실학사상을 이해하는 맥락에서도 ‘연행록’으로 대표되는 중국 청류(淸流)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일본을 통해서도 실용적 지식 체험이 광범위하게 이뤄졌어요. 실학 연구의 시야를 넓혀 동아시아 전체를 조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계미사행의 세 사신(정사, 부사, 동사)을 수행했던 서기와 제술관(製述官)들의 기행기록- <일관기(日觀記)> <일본록(日本錄)> <화국지(和國志)> <승차록(乘槎錄)> 을 번역한 것이다. 저자였던 원중거, 남옥 등은 당대의 문장가들로 문학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자료다.

“1970년대 민족문화추진회(민추)가 번역한 <해행총재> 에 조엄의 <해사일기> 가 있지만, 실제 일본의 문화ㆍ지식인들과 교류했던 것은 이들 서기와 제술관이었어요. 책에는 그들이 일인들과 나눈 시와 산문 등이 적지 않아요.” 통신사 일행이 당도한다는 소식에 일본 전역의 학자 서민 등이 구름처럼 몰려와 토론하고 시를 나누는 장면 등도 책에 소개돼 있다.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일반인들의 교양적 텍스트로도 좋을 겁니다. 번역자들이 제목을 정하면서 그런 희망을 담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연구자들의 외국 자료 독점은 극복해야 할 폐습 가운데 하나지만, 번역을 홀대하는 우리 학문 풍토에도 그 책임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제자 4명이 번역하는 데 꼬박 1년을 쏟았고, 수정하는 데도 그만큼 시간을 들였어요.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학문적 평가는 극히 미약한 실정이거든요.” 추가 번역 계획이 있냐고 묻자 그는 “번역돼야 할 자료들은 아직도 많지만…” 하더니, 말 꼬리를 흐렸다.

●심사평 - "사행록 되살린 기획·감수·번역 높이 평가"

임진왜란 직후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차에 걸쳐 이루어진 통신사행 중 11차에 해당하는 계미사행(1763~1764)은 에도(江戶ㆍ현재의 도쿄)에까지 갔다온 사행으로는 마지막 통신사행으로 가장 많은 사행록을 남겼다. 4권으로 번역된 이 사행록들은 거의 2,0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18세기 중기 조선 지식인들의 눈으로 기록한 당시 일본의 여러 모습들과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편집부문 수상작으로 택하면서 심사위원들은 편집의 개념을 확대 해석하였다. 지금까지 기능적 수준에 머물렀던 편집의 개념이 근래에 들어 기획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출판 현장의 편집개념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사행록들을 되살려내기 위한 기획ㆍ감수자와 번역자들의 값진 안목과 노력도 높이 평가되었다. 적절하게 필요한 곳에 알맞게 삽입된 이미지들의 선택과 표현도 이 책을 수상작으로 결정하는데 보탬이 됐다.

그러나 한자로 된 일본의 인명, 지명, 용어 등을 우리의 발음대로만 표기한 점은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5년 여에 걸친 감수자, 번역자들의 고생과 이 책들을 우리 앞에 놓이게 해준 출판사의 용단에 격려와 축하를 드린다.

정병규 정디자인 대표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번역부문 - '사생활의 역사' 주명철씨 등

근대화, 국가건립 등 거대 담론 속에서 개인 그리고 개인을 둘러싼 많은 현실은 뒷전에 밀리기 일쑤다. <사생활의 역사> 는 그런 흐름에 반기를 드는, 새로운 시도다. 걸출한 위인 주도의 정치사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일상과 사생활에 초점을 맞춘 인간의 역사다.

책은 프랑스 역사학자 조루주 뒤비와 필립 아리에스의 책임 편집 하에 1985~87년에 출판됐다.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에 1, 3, 4권이, 올해 나머지 2, 5권이 번역돼 나왔다. 로마제국부터 현재에 이르는 2,000년 세월을 담다 보니, 번역본은 다섯 권 5,000쪽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이 돼버렸다. 번역에는 주명철 한국교원대 교수, 전수연 연세대 교수, 이영림 수원대 교수, 역사학자 김기림씨, 성백용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원, 파리5대학 사회학 박사 과정에 있는 김지현씨, 번역가 김수연씨 등이 참여했다.

번역자 가운데 책을 처음 접한 사람은 주명철(56) 교수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행사 때 파리에 갔다가 책을 구입한 뒤 틈틈이 보다가 번역을 결심했다. 마침 새물결출판사가 한국어판권을 획득하면서 번역 작업이 본격화했다. 전수연 교수와 함께 1권을 번역했는데, 3년 정도 걸렸다. “프랑스어 좀 안다고 덤볐는데, 정말 힘에 겨웠다”고 고백할 만큼 번역은 어려운 일이었다.

3권을 담당한 이영림(49) 교수도 “문장이 난해한데다, 여러 필자가 각자의 업적을 압축적으로 소개한 글이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2권 번역을 맡은 성백용(44) 연구원은 “일관된 논지와 방법론에 따라 쓴 것이 아니라 여러 필자가 넓은 재량을 가지고 자신의 관점과 기량을 펼친 책”이라고 평가했다. 여러 화가가 공동 주제 아래 자기가 맡은 화면을 자유로이 그린 거대한 벽화 같아서, 언뜻 산만한 조각 그림처럼 보이지만 뒤에서 곱씹어보면 전체의 윤곽이 어렴풋이 들어오는 그런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역자와 용어와 문체를 통일하는 게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번역에 얽힌 고생담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의 역사> 는 재미와 정보를 두루 갖춘, 스케일 큰 책이라는 게 번역자들의 공통된 평가다. 주명철 교수는 “미시사로도, 문화사로도, 문명사로도 볼 수 있다”며 “한 카테고리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역사의 현장을 담고 있어서 전문가도, 일반 독자도 함께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번역부문 - '순수이성비판' 백종현씨

독일 철학자 칸트(1724~1804)를 흔히 ‘서양철학의 저수지’라고 비유한다. 그리스ㆍ로마 철학, 기독교 사상, 수학적 자연과학 등이 칸트 철학에서 합쳐졌다가 다시 여러 학파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를 추종하거나 비판하면서 철학을 할 수는 있어도 칸트를 모르고는 철학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의 대표작 <순수이성비판> 이 여러 번 한글로 번역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백종현(56)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번역본(아카넷 발행)은 그 중 가장 최근작이다. 그는 1975년 박사 과정에 들어가면서 칸트 철학을 시작해 30년 이상 이 분야에 매달려온 칸트 전문가다.

이전 번역본은 일본어로 된 2차 문헌을 바탕으로 한 것이 많지만, 그의 <순수이성비판> 은 독일어 원전을 직접 옮긴 것이다. 각지(覺知), 오성(悟性)처럼 이전 번역본에 나오는 일본식 단어를 포착, 지성 등으로 바꾼 것도 원전을 옮겼기 때문이다. 백종현 번역본의 또 다른 특징은 풍부한 주석이다. <순수이성비판> 에 나오는 구절이 어디에서 인용됐는지를 일일이 확인해 주석을 붙였다.

백 교수는 “인간의 이성을 과대평가한 초기 계몽주의의 오류를 지적하고,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가치의 존재를 알리는 책”이라고 <순수이성비판> 을 평가했다. 이 책을 독일어로 썼다는 것도 의미가 크다. 당시 독일 지식인이 라틴어로 책을 썼기 때문에 라틴어를 모르는 민중은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따라서 독일어로 책을 쓴 것은 지식의 독점 체제를 깨고, 지식의 공유 체제를 형성하는 시발이 됐다.

백 교수는 “학술 번역의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한다. 교수, 전공자 등 전문가가 원전을 대신해 읽을 수 있도록 의역을 배제하고 100% 직역했다는 것이다. 칸트가 틀리게 쓴 것은 틀리게 번역하고(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은 주에서 별도로 표시했다), 칸트가 라틴어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한자로 표기해 고어 분위기를 살렸다. 그의 번역본을 누군가 나중에 독일어로 다시 옮길 경우, 원전과 달라지지 않을까 걱정했고 이를 막기 위해 책에 ‘유사어 및 상관어 대응 번역어표’ 등을 두어 독일어 단어와 그것이 옮겨진 한글 단어를 일목요연하게 표기하기도 했다.

백 교수의 번역이 86년 시작됐으니 결실을 맺는데 20년이 걸렸다. 시간의 길이가 그렇듯, 원고지 4,000여 매의 방대한 분량이 그렇듯, 번역에 많은 공력이 들어간 책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사진=원유헌기자 youhoney@hk.co.kr

번역부문 심사평

현재 한국은 세계적인 출판 강국인 동시에 번역 대국이다. 그러나 각종 고전과 명저를 비롯한 주요한 원전의 번역, 그리고 정보와 지식의 준거가 되는 사전을 비롯한 다양한 참고문헌에 대한 관심과 정리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 원전과 참고문헌의 빈곤은 근래 논의된 ‘인문학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올해 출판문화상의 번역부문 예심을 통과한 11종의 후보작은 적지 않은 희망을 주었다. 철학, 역사, 평전,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묵직한 번역물이 다수 보였기 때문이다.

논의 끝에 최종적으로 주명철 외 번역의 <사생활의 역사> 와 백종현 번역의 <순수이성비판> 두 종을 선정하였다. 먼저 <사생활의 역사> 의 번역은 기획에서 완간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린 방대한 작업인데, 정확하고 부드러운 번역으로 이 기념비적인 대작을 소개하고 있다. <순수이성비판> 은 역자의 20년에 걸친 공력과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하는 ‘연구번역본’으로서 고전이 항상 새롭고 충실하게 번역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준다. 각기 참고문헌과 원전의 번역에서 하나의 전범이 되리라 믿는다.

이동철 용인대 교수

어린이·청소년부문 - '들풀들이…' 홍순명씨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 등 옛이야기 대부분은 오랜 동안 조금씩 고쳐져 온 것들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심성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쳐온 것이지요.”

홍순명(69) 씨의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이야기> (1~3권)는 그 옛이야기들의 이 시대 버전이다. 관용을 이야기하는 <불운한 혁명아, 홍길동> , 백성 속으로 뛰어드는 <조선의 브나로드, 이몽룡> , 벼슬보다 재산보다 학식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귀하게 아는 <선녀와 나무꾼> ….

23살이던 1960년부터 2002년 정년 때까지, 또 그 이후 대안학교인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교사를 지낸 그는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싶은 한국인의 귀한 심성,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쓰고싶었다”고 말했다. 이 책은 정년과 함께 계간 교지 <풀무> 와 <지역과 학교> 에 연재했던 글들을 엮은 것이다.

“옛 이야기 속에는 겨레의 심성과 가치관의 원형이 담겨있잖아요.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도전을 받으며 낡은 것으로 취급되도록 방치할 순 없죠.” 그의 이야기는 그 원형에서 긍정적인 가치들을 돋우고 부정적인 것들을 낮춘 ‘현재의 이야기’이고, ‘미래의 이야기’이다. 달리 말해, 가난한 나무꾼을 선택하는 선녀의 가치관처럼, 이상론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도 “이게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오늘의 경쟁 현실 속에서도 자연과 인간의 공존, 양극화, 전쟁의 위협 등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있잖아요.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소명 또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숙제고요.” 그는 다양한 가치가 이야기되는 사회, 특히 내일의 가치가 될 수 있는 지금 소수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말끝에 농촌 이야기도 꺼냈다. “아름다운 삶의 고향인 농촌이 도태의 위기를 맞고 있지요. 이는 우리 농업이 지닌 다면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예의 나직한 음성으로 자신과 이 책을 끊임없이 낮췄다. “시골 학생들과 오순도순 마주앉아 이야기하듯 쓴 서툰 글”이라고도 했지만, 심사위원들은 “한 생을 땅과 함께 살며 생명의 가치를 몸소 일궈온 이라야 쓸 수 있는 귀한 글”이라고 상찬했다.

[심사평] '고전의 재창조' 소중한 성과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 이야기 1~3> 은 우리 민족의 고전을 오늘의 시각으로 되살리는 소중한 시도와 성과다. 예전의 고전을 단지 복원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역사관과 가치관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작품 역시 완전히 다르게 재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진정한 온고지신의 경지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귀감이다. 실제로 이 책은 청소년들에게 우리 고전을 살아있는 우리 시대의 교과서로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면 평생 동안 교육 현장에서 바람직한 교육을 펼쳐오고자 노력해 오신 훌륭한 교육자의 지혜와 철학, 그리고 우리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이야기꾼의 솜씨를 만끽할 수 있다.

홍순명 씨의 책이 청소년들에게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자신의 현재와 미래까지 풍요롭고 알차게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심사위원으로서 감히, 그러나 매우 기쁘게 청소년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끝으로, 올해 나온 제3권이 민요와 마당극까지 범위를 넓혀 다루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선생님의 작업이 계속되어 더욱 훌륭한 결실로 맺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허병두(숭문고 교사,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 대표)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심사총평 '좋은 책 향한 저자·출판인 열정 느껴져'

양적 성장 비해 눈에 띄는 작품 줄어… 시대정신 담는 치열한 부족 아쉬워

불안하다. 양적으로는 분명히 늘었고 눈에 띄는 책들도 많건만, 그 불안감은 심사를 마치는 순간까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의외로 고만고만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으며 한 해를 대표할 만한 빼어난 책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했다. 시대정신을 담아내거나, 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신을 찾고자 하는 치열함이 담긴 책을 만나기 어려웠다. 새롭고, 역동적이고, 저돌적이며, 문제제기적인 책이 몇 해 전보다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 탓인지도 모른다. 지속되는 시장 불황은 의미 있는 책의 생산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늘 그러는 가운데서도 살아 움직인 것이 출판이었다. 그것만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변화된 시장환경에 대한 적응의 문제인 듯싶다. 교양인들을 위한 의미 있는 기획보다 논술시장을 겨냥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질을 보장하는 책보다는 매출 증대에 신경을 곤두세운 책들이 점두를 점령한 탓이라 여겨졌다. 불안감에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치 있는 책을 내고자 애쓴 저자들과 출판인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문제의식에 충만한 책들이 나왔고, 우리의 지식창고를 풍요롭게 할 고전적인 저서들이 번역되었다. 주목할만한 신인들의 책도 있었으며, 시쳇말로 ‘이름값’하는 중견 학자들의 저서도 있었다.

이만하면 되는 것 아닌가? 비록 눈에 번쩍 뜨일만한 대형 기획물이 없었고,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문제작은 없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이룬 지적 성취를 책이라는 그릇에 담아낸 것만으로도 만족의 근거는 된다. 그러니, 희망을 품을 수밖에.

그렇지만, 감히 주문하건대, 다시 우리 출판이 ‘야성’을 찾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비록 거칠더라도, 비록 시장에서 깨지더라도 ‘기득’에 만족하지 않는 도전정신으로 충만하기를.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이 안주로 나타나지 않기를. 깨어 있고 부숴버리고 넘어서게 하는 책이야말로 독자들로 하여금 읽고 싶게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바로 그런 책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뜻으로 ’상‘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서평론가 이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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