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한해 앞둔 5년 전 이맘 때 민주당 노무현 고문이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는 기사는 신문지면 한 귀퉁이에 짤막하게 실렸다. 당시 이인제 권노갑 한광옥 등이 이끄는 주류와, 한화갑 김근태 정동영 등의 비주류가 양분하고 있던 민주당 세력판도에서 그는 크게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반의 이미지도 10여년 전 5공 청문회로나 기억되는 개성있고 혈기방장한 소장 정치인 정도였다. 이듬해 봄 민주당 경선이 시작될 때만 해도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현직의원은 천정배 한 명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서운 대중적 돌풍을 일으키며 단 한달 여 만에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는 기적을 만들었다. 대선 양상도 다르지 않았다. 선거일을 3개월 앞두고도 그는 지지율 10%대를 넘기지 못했으나 후보 단일화를 발판으로 또다시 판세를 뒤집어 마침내 대권까지 움켜쥐었다.
이 일련의 과정은 한국 정치사상 가장 대중을 열광케 한 드라마였다. 그러나 드라마는 거기서 끝났다. 그 열광의 뒤끝이 어떤지는 노 대통령 스스로 "(당시 내게) 표 찍으라고 한 고향친구, 학교동창들이 지금 박살나고 있다"고 표현했을 정도니 굳이 더 얹어 얘기할 것도 없다.
● 'Again 2002'는 축구에서나
지난 일을 새삼 돌이켜 본 것은 대선정국에 접어들면서 지금껏 경기장 밖에 있던 인사들이 후보감으로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때문이다. 여당 수뇌부가 공개 구애에 나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대표적이거니와 이밖에도 저명한 시민운동가, 기업인 등 여러 명망가들이 거명되고 있다.
각 분야에서 명성과 경륜을 쌓아 온 이들은 대선국면을 휘저을 카드로 정치권이 욕심낼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축구라면 몰라도 대선에서 'Again 2002'는 안 될 말이다. 정상적인 정치공학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니 오해는 말기 바란다.
당시 노 후보와 현재 거명되는 이들은 활동영역과 경력, 성향 등이 판이하지만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기존 정치판에 때 묻지 않은 참신성이다.
언뜻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정치인에 대한 인식이 극히 부정적인 현실에서 이게 대단한 위력을 지닌 덕목임은 이미 증명된 바다. 그러나 이는 그만큼 덜 알려져 있다는 의미도 된다. 해당 분야를 넘어 과연 국가를 운영할 만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재목인지를 일반이 판단하기엔 정보가 충분치 않다는 뜻이다.
이러면 대선은 원천적인 불공정 게임이 된다. 정치권에 노출된 다른 후보감들은 돌연 부각되는 인물들과 달리 오랫동안 정치·행정 능력과 언행 등 일체를 시시콜콜 검증받아 온 점에서 그렇다. 익숙하면 식상해지고 그러면 장점보다 단점이 눈에 더 띄기 마련이다.
● 국가지도자는 충분한 검증기간 필요
이 때 위험한 것은 선택의 도박성이다. 잘 알려진 후보감들이 앞서 든 이유로 다들 성에 안 찰 경우 미지의 후보에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거는 심리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못마땅한 현실 대신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선택하는 경향이다.
이는 시정의 작은 조직에서도 경계할 일일진대, 하물며 국가의 명운을 맡길 최고 지도자를 뽑는 일임에랴. 특히 극장식 정치화 현상이 날로 심해지고, 그에 따른 이벤트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우리 정치풍토를 감안하면 위험성은 더 커진다. 그 도박의 결과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이다.
그러니 국민들부터 냉철해질 일이다. 선거에서 최선의 선택이란 없는 법이니 공란(空欄)보다는 차선, 또는 차악을 염두에 두는 것이 최소한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정치권도 얄팍한 계산은 치워 버리고 지금까지의 평가를 기반으로 정정당당하게 남은 1년을 국민 마음을 더 얻기 위해서 노력할 일이다. 자칫 쌓아 온 명성과 업적마저 훼손되는 우를 범치 않도록 거론되는 인사들도 신중히 생각하기 바란다. 지금껏 정치무대에 오르지 않은 잠룡이라면 이번엔 그냥 물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다. 국민의 쓴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