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의 천불이 좀체 사그러들지 않는다. 잇따른 망년회 자리에 기대 술에 녹여도 보고 담뱃불에 태워도 보지만 잊는 건 찰나일 뿐. 맨정신이 들면 천불은 가슴 속에서 더 크게 피어 오른다. 큰 숨으로 가다듬으려 해도 호흡마저 턱턱 가로막는 천불 덩어리.
참을 수 없는 뜨거움이 차를 달리게 했다. 눈보라 휘날리는 순백의 세상으로 가 가슴 속 불덩어리 식히라 명령을 내린다.
옛 대관령휴게소에 차를 대고 선자령(仙子嶺)으로 올랐다. 선자령은 강릉과 평창의 경계에 선 봉우리로 해발 1,157m 높이에서 사방의 높고 낮은 산들의 물결을 감상할 수 있는 백두대간의 전망대다. 1,000m가 넘는 높이지만 산행의 시작점인 휴게소의 해발이 840m이니 317m만 더 오르면 되는, 큰 힘 들이지 않는 산행코스다.
눈꽃 트레킹은 설원으로 떠나는 고행의 길이다. 고약한 찬바람에 코는 얼어붙고 귀는 찢어져나갈 것 같다. 하지만 촉각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시각적 묘미는 그 어느 계절의 트레킹보다 매력적이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눈길은 흰빛으로 아늑하다. 모든 빛을 감싸 안을 순백의 눈(雪)빛이 있어 그 고행의 길은 서러움을 달랠 위안의 길이 된다.
등산로 초입 눈길 위로 징소리가 울린다. 산길 아래 대관령 국사성황사에서 굿판이라도 시작됐나 보다. 누구의 원을 달래려는 걸까. ‘궁 궁 궁~’ 울려 퍼지는 징소리에 가슴속 무거운 짐 일부를 태워보낸다. 아무도 없는 눈길. 먼저 간 이들이 발자국만 남겨 길을 안내한다.
지난 봄 얼레지 현호색 등 야생화 지천이던, 지금은 벌거벗은 나무와 흰 눈뿐인 숲을 지나자 길은 편편해지고 능선과 능선이 치맛자락 펄럭이듯 물결친다. 하얀 소복 입은 그 능선 위로 휘휘 큰 원으로 바람을 그려대는 풍력발전기들. 해가 모처럼 구름에서 나오자 바람이 훑고 간 반질반질한 눈밭은 은빛 투구마냥 반짝거린다.
선자령 꼭대기에 이르도록 풍력발전기는 계속 튀어나온다. 풍력발전기 밑에 서니 웅웅 거리는 진동이 몸으로 느껴진다. 저 육중한 몸짓. 맷돌이 돌듯 바람을 갈아낸다. 가슴 속 천불덩어리까지 한껏 빨아들여 갈아버렸으면. 이 모든 응어리 가루가 되도록 바수어버렸으면.
마침내 도착한 ‘바람의 봉우리’라는 선자령 꼭대기. 백두대간을 표시한 산경표가 거대한 돌에 새겨져 정상에 서있다. 꼭대기에 불어대는 백두대간의 바람은 역시 거셌다. 귀는 바람소리로 먹먹하고 몸은 잔뜩 웅크려지는데, 사방 하얀 능선들의 풍경은 얼마나 장쾌한지 눈과 마음이 번쩍 트인다.
그래 세상 설움 뭐 대수겠는가. 풍진 세상 바람맞고 사는 거지. 산꼭대기 허허로운 공간에 올라 대놓고 맞아보는 거지.
대관령 휴게소에서 5km… 왕복 4시간이면 충분
선자령 산행은 지금은 456번 지방도로로 전락한 옛 영동고속도로의 옛 대관령휴게소(상행선)에서 시작된다. 영동고속도로 횡계IC에서 나와 456번 지방도로에 올라탈 수 있다. 대관령 휴게소에서 선자령까지는 5km. 왕복4시간이면 충분하다.
국사성황사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항공통제소까지 이어진 콘크리트 길을 만난다. 이 길을 300m 정도 걸어야 선자령 가는 본격적인 산길이다. 산길은 대부분 능선 위로 이어져 장쾌한 설원을 감상하기에 제격이다. 왼편으로 대관령 목장의 설원이 펼쳐진다.
선자령에서 하산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대관령휴게소로 되돌아오는 방법 외에 ‘선자령 나즈목’에서 보현사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과 어흘리의 초막골로 내려가는 방법이다. 다른 두 코스 모두 경사가 몹시 가파르다. 아이젠은 필수다.
선자령(평창)=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아듀 2006!' 대관령 눈꽃 트레킹 명소
하얀 눈세상과 벌거벗은 나무, 그리고 나. 밀가루 바스라지는 감촉이 발 밑에서 몸을 간질이는 눈길은 소리로 걷는 여정. 겨울에 떠나는 눈꽃 트레킹은 맑은 사색을 강요한다. 국내 눈꽃여행의 메카는 단연 대관령이다. 영동의 관문인 대관령은 산마루에 걸터앉아 눈을 쏟아대는 구름으로 겨울이면 그 어느 곳보다 많은 눈이 쌓이는 곳이다. 한겨울이면 순백의 세상을 여는 대관령 주변에는 선자령 외에도 대관령옛길, 발왕산 등 눈꽃 감상지가 많다.
대관령 옛길
대관령에는 옛길이 2개 있다. 하나는 새로 반듯한 길이 뚫리면서 지방도로(456번)로 전락한 옛 영동고속도로이고, 다른 길은 반정에서 강릉 성산으로 내려가는 산길이다.
456번 지방도로는 찾는 이들이 없어 호젓하다. 나무 한 두 그루 뿐인 민둥민둥한 구릉이 소복히 눈을 담고있는 모습은 추사의 <세한도> 를 연상시킨다. 세한도>
대관령 옛길은 대관령휴게소에서 강릉쪽으로 조금 내려간 반정(半程)에서 강릉시 어흘리의 대관령박물관까지의 약 5㎞ 구간. 구비구비 산길은 옛날 영동의 모든 사람과 산물이 서울로 넘었던 길이고 소설가 이순원이 어린 아들과 사람과 삶의 구비를 얘기하며 걸어 넘은 길(소설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이다. 중간에 나그네가 목을 축이던 주막터가 있고 이곳부터 계곡을 만난다. 아들과>
발왕산
발왕산(1,458m)은 남한 땅에서 10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름만으로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설악산, 오대산 등 유명 국립공원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찾는 산이다. 발왕산 자락에 안긴 용평리조트 때문이다. 발왕산은 쉽게 오를 수 있다. 스키장에서 정상까지 곤돌라가 연결됐다. 편도 3.7㎞로 20분이 걸린다. 곤돌라 이용요금 1만2,000원.
정상에 서면 사방 백두대간의 고산준령이 발아래 물결친다. 정상의 산책로는 숲길이다. 잎을 떨군 나무들이 눈꽃을 피워내고 있다. 리조트는 최근 정상에 제설기를 설치해 언제라도 아름다운 눈꽃을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용평리조트 (033)335-5757
피덕령 안반덕
용평리조트 인근에 있는 피덕령은 덜 알려진 눈꽃 감상지다. 평창과 강릉을 잇는 고개로 고갯길 꼭대기에 안반덕이라는 가운데가 움푹한 평원이 펼쳐진다. 비스듬한 경사면에 나무라고는 드문드문 몇 그루만 서있을 뿐, 땅은 텅 비어있다. 초여름이면 감자꽃이 흐드러지고, 배추의 청청함이 물결치는 고랭지밭들이다. 산꼭대기에 조성된 드넓은 채소밭이 한겨울 흰 눈의 장막을 펼치고 설국을 노래한다. 밭들 사이사이에 7, 8채 되는 집들이 서 있지만 모두 빈집이다. 워낙 눈이 많은 곳이라 주민들은 농사가 끝나면 강릉의 또 다른 집들로 모두 내려간다. 아무도 지나지 않은 순백의 설원 위에 내 발자국을 수놓고, 몸뚱이를 찍어대도 유치하다고 아무도 뭐라는 이 없다.
양떼목장
선자령 초입에 대관령 양떼목장이 있다. 고기나 털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 관광용으로 양을 키우는 곳이다. 목장에는 200여 마리의 양이 겨울을 나고 있다. 양떼 우리 옆 능선에는 영화 ‘화성으로 간 사나이’ 세트장으로 사용된 움막이 멋진 배경을 하고 섰다. 양들에게 건초주기와 추억의 비료포대 눈썰매 타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입장료(어른 2,500원, 학생 2,000원)를 내면 양에게 먹일 건초 한 봉지를 받는다. (033)335-1966
● 눈꽃 트레킹 준비물
눈꽃 트레킹에는 필요한 준비물이 많다. 눈길 산행에서의 작은 실수가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필수 장비는 손전등과 아이젠. 겨울은 특히 일몰이 일러 갑자기 날이 어두워질 수 있다. 아이젠은 4발짜리 이상이면 트레킹에 무난하다. 아이젠은 길을 떠나기 전 미리 등산화에 부착해 끈 길이 등을 조절한 뒤 꺼내기 쉽게 배낭의 윗부분에 넣는다.
눈길에 운동화는 금물이다. 발목까지 감싸고 고어텍스 등 방수기능을 갖춘 등산화를 신어야 한다. 장갑이나 양말은 쉽게 젖을 수 있으니 한 두벌 더 준비하는 것이 좋다. 등산용 바지와 함께 매서운 겨울 산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는 윈드 재킷이 필요하다.
이밖에 방한용 털모자와 상비약, 계속 걷느라 소비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초콜릿, 인절미 등 간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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