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산타클로스가 왔다. 좀 이르다. 사슴썰매대신 청진기를 목에 걸었다. 아이들은 필리핀에서 왔다. 양말대신 병명(病名)을 적은 팻말을 방에 걸었다. 답답하고 지루했던 6평짜리 병실은 “메리 크리스마스”로 가득 찼다.
‘산타클로스=의사, 필리핀 아이=병원.’ 언뜻 보면 낯선 조합이지만 이날 고려대안산병원에선 엄연한 현실이다. 꼭 껴안고 사랑을 나누는 일에 세상의 공식따윈 의미가 없다. 아이들의 웃음은 선물로 받은 갖가지 크레파스 색깔처럼 아기자기했다.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의사들은 뿌듯하다.
머나먼 이국 땅, 그것도 병원에서 이른 크리스마스 파티를 맞은 필리핀 아이들의 사연은 남다르다. 사실 아이들은 학용품이 든 선물상자보다 더 큰 선물을 받았다. 바로 콩닥콩닥 뛰는 생명이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크리스마스 선물인 셈이다.
필리핀 아이 3명은 12일 병원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에릭손말(3) 스테파니(9ㆍ여)는 ‘동맥관 개존증’을, 닉냐가(6)는 ‘심실중격결손’을 앓고 있었다. 동맥관 개존증은 막혀있어야 할 동맥관이 열려 있는 병이고 심실중격결손은 심실에 구멍이 뚫린 질환이다. 모두 선천성 심장병이다. 알렐리발(23ㆍ여) 제이삼(20ㆍ여)씨도 같은 증상 때문에 왔다.
이들은 14~21일 차례로 무료수술을 받았다. 호흡곤란과 답답한 가슴 때문에 눈물을 달고 살던 에릭손말은 수술(14일) 뒤부턴 방글방글 제 호기심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는 22일 구개열(속칭 언청이) 수술을 앞두고 있다. 중이염도 발견됐지만 한국의 의사 산타클로스가 모두 치료해줄 예정이다. 다른 이들도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
한국의 인술(仁術)이 아니었다면 평생 고통을 감수하거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처지였다. 모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편이라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필리핀의 의료 수준도 열악했다.
무엇보다 이번 무료수술이 뜻 깊은 건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켰다는데 있다. 고려대안산병원 ‘필리핀 심장병 어린이 지원사업단’은 9월 11~15일 케손시티 라오마그 등 필리핀의 빈민촌을 찾아 심장병 무료검진을 펼쳤다.
심장병 어린이 200여명을 진료했다. 아쉬움이 남았다. 현지에선 완치시킬 수 없었다. 단장 장기영 소아과 교수는 “다 치료한 것도 아닌데 감사의 표시로 집에서 쪄온 옥수수를 건네는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걸고 ‘꼭 완치시켜주마’라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3명의 아이와 2명의 여성이 무료수술 대상자로 결정됐다. 제이삼씨는 “병원을 가기도 벅찬 빈민촌에 찾아와 진료를 해준 것도 고마운데 한국까지 초청해 수술까지 해줘 꿈만 같다”고 말했다.
사랑의 심장병 수술 프로젝트는 병원뿐 아니라 부산에 있는 심장병어린이재단 성안선교회(회장 백종구)가 지원했다. 베트남 러시아 등으로 사랑의 릴레이를 차근차근 넓혀간다. 새 생명을 얻은 필리핀 아이들은 평생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를 보낸 뒤 28일께 고국으로 돌아간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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