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김에 서방질한다죠. 제 경우는 홧김에 수집해요. 첫 눈에 ‘저건 내거다’ 싶은 걸 사면 한 달은 배 부르고, 1년은 행복하거든요. 게다가 아무리 하찮은 물건도 좋은 수집가를 만나면 명품이 되는 그 오묘한 성취감, 안해본 사람은 몰라요.”
최홍규(49) 쇳대박물관 관장겸 최가철물점 대표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수집광이다. 20대부터 놀이 삼아 황학동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며 열쇠와 자물쇠를 사 모은 것이 4,000여 점. 그 컬렉션을 밑천으로 사설 박물관까지 설립했으니 취미가 곧 인생이 됐다. 열쇠와 자물쇠만 아니다.
가야와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토기류가 수백 점, 대장간 용품들도 수천 점에 이른다. 중견부터 신인에 이르기까지 그림도 100여 점이 있다. 대학생 아들이 둘 있지만 “신발장을 열면 내 것이 전부”라고 할 만큼 신발도 많고, 모자도 개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몇 년 전 싹 정리하고도 남은 것이 100여 개다. 도대체 한번 ‘꽂히면’ 멈출 수 없는 수집에의 매혹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어릴 때부터 물건 욕심이 좀 많기는 했어요. 오죽하면 결혼할 때 부모님한테 일체 손을 안 벌렸는데, 어머니가 쓰시던 새우젖독이 하도 맘에 들어서 그건 들고 나왔죠, 하하.(그 새우젖독은 지금 쇳대박물관 4층에 있는 사저 현관에서 인테리어 소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수집의 즐거움을 안 것은, 열쇠를 모으면서 수집의 모든 과정과 결과가 결국은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무렵이라고 할까요. 그 속에 희로애락이 다 있어요.”
최초의 수집벽은 슬픔 혹은 열등감에서 시작됐다. 대학입시에 떨어지고 재수하던 시절, 학원비를 벌어볼 요량으로 을지로의 한 철물점에서 일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친구들의 번쩍이는 대학교 배지에 기죽고, 남들은 캠퍼스를 활보할 때 생업전선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에 남몰래 눈물짓던 소심한 청년은 시간만 나면 황학동에 나가 온갖 고물을 구경하는 혼자 놀이로 시름을 달랬다.
일하던 철물점 사장님과의 인연도 작용했다. 개성 출신으로 삼복더위에도 ‘부채를 세워놓고 머리를 흔들 정도’로 근검했던 사장은 최 관장에게 아버지이자 친구이자 연인 같은 특별한 존재이면서 철물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인물이었다.
”철물이라는 게 하류인생들이 근육 힘만으로 하는 단순노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철을 다뤄보니 그 유연함과 섬세함이 상상을 초월해요. 못 하나에도 철학이 담겼구나, 가장 섬세한 손만이 불에 시뻘겋게 달궈진 철을 자유롭게 할 수 있구나 깨달았어요. 실용과 감성적인 디자인이 함께 어우러진 철물에 꽂힌 건 거의 필연인 것 같아요.”
군대를 제대한 뒤 학업에 대한 미련을 아예 접고 본격적인 수집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당시만해도 누구도 관심을 갖지않던 앤티크 열쇠와 자물쇠가 대상이었다. 기질적으로 ‘용의 꼬리 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는 걸 선호’하는 사람답게 미답의 영역을 개척하고 싶었다. 10만원이면 쌀 포대로 가득 고물 열쇠와 자물쇠를 살 수 있던 시절. 탁월한 철물디자이너로 관련업계에선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최 관장에게 물건을 팔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수집이 내게는 인생공부였어요. 믿었던 사람한테 사기 당하고, 뜻밖의 횡재에 희희낙락하고, 욕심이 과하면 반드시 실패하고. 수집벽은 기본적으로 병이지만, 인생을 배우게 해주는 좋은 병이라고 생각해요. 덤도 있죠. 잘만 하면 21세기 첨단유망산업이라는 문화사업의 주춧돌을 놓는 역할도 할 수 있거든요. 쇳대박물관을 보세요.”
한번 수집에 맛을 들이면 관심영역이 계속 확대된다. 최 관장도 철을 시작해 토기, 대장간 물품, 서양화 등으로 넓혀갔다. 모자는 절친한 친구인 헤어디자이너 이철씨가 해외여행길에 사다준 털모자가 인연이 돼서 20년째 모으고 쓰고 있다. 30대에는 ‘철물업계의 서태지’라고 불릴 정도로 긴 머리에 모자 차림으로 유명했다. 볼사리노의 최고급 스웨이드 중절모부터 아르마니의 니트모자, 페라리 야구모자에 이르기까지 워낙 모자를 많이 사모으다보니 신제품이 들어오면 브랜드 매장에서 “시착하러 나오시라”고 전화한다.
“검정과 파랑을 유난히 좋아해서 옷도 죄다 검거나 파란데 그때 모자가 액센트 구실을 훌륭하게 하죠. 모자를 쓰면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즐거워요.”
부전자전인지 최 관장의 아들도 벌써부터 수집취미가 유난하다. 통계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대학원에서는 미술사와 미술행정을 배울 계획이라는 장남은 만화책과 미니어처 로봇 캐릭터, 장난감 차 기어들만 모은 컬렉션이 벌써 수백 점에 이른다. 언젠가는 그의 컬렉션이 또 다른 박물관의 현판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일. 그렇지 않더라도 최 관장은 아들의 수집벽이 흐뭇하다.
“수집의 기본은 애정이에요. 애정이 있으면 대상을 공부하게 되고, 알면 알수록 더 잘 모을 수 있게 돼요. 잘 선별된 컬렉션은 그 자체가 훌륭한 문화유산을 후대에 물려주는 길도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취미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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