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와 피말리는 사투 앞에 그는 '열혈 청년'이었다
4월17일 오전11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화재현장. 소방 호스를 움켜 쥔 소방관들의 이마에 핏줄이 선다. 자재 더미에서 발화해 신축 중이던 상가 전체로 번져 오르던 불길도 잦아들기 시작한다. 불길은 다행히 소방차가 도착한 10여분 만에 잡혔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화마(火魔)와 사투를 벌이느라 소방관들의 방화복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화재 규모도 작고 인명피해도 없어 화재진압은 비교적 수월하게 끝이 나는 듯 했다. 그러나 공사장 지하에 산더미처럼 쌓인 자재에 불꽃이 남아 있는지 누군가 확인을 해야 했다. 철수를 준비하던 지친 대원들 가운데 쉽게 나서는 이가 없다.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허재경(43) 소방관이 궂은 일을 자원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바깥 세상과 달리 랜턴 불빛이 5m 앞의 물체도 비추지 못하는 짙은 연기 속으로 들어간 허 소방관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자재 운송을 위해 뚫어 놓은 지하 1층 리프트 구멍에서 발을 헛디딘 그는 지하 4층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화재 현장에서는 누구보다 정열적인 ‘불쟁이’로 변했던 허 소방관의 허망한 죽음 앞에 동료들은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동료들은 “화재현장에서의 허 소방관과 평소의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며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격이라 ‘순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1991년 허 소방관이 ‘시보’ 소방사로 첫 발을 내딛을 때와 사고 당시 함께 일했던 이종연(57) 강남소방서 역삼파출소장은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겼다. 이 소장은 21일 “허 소방관은 요즘 보기 드문 효자였다”며 “육남매 중 다섯째임에도 소방관으로 임용되자마자 경기 여주에 계신 부모님을 모셔왔다”며 허 소방관에 대한 기억을 털어놨다.
허 소방관은 독신으로 살며 6년 전 교통사고로 몸이 불편하게 된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근무가 없는 날이면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이 소장은 “술을 전혀 하지 않고 마음 속 얘기를 털어 놓지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순수한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며 “사고가 난 지 여덟 달이 지났지만 지금도 아침 교대시간이면 허 소방관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설 것 같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와 같은 근무조였던 정갑철(39) 소방관은 “허 선배는 부모님을 모시느라 자가용도 없이 내 차를 얻어 타고 출퇴근을 했다”며 “사고 이틀 전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차를 한 대 사고 싶은데 뭐가 좋겠냐’고 묻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허 소방관은 3월 ‘위험직무 순직공무원 특례법’이 발효된 뒤 처음으로 법 적용을 받는 순직 공무원이 됐다. 가족들은 정부로부터 약간의 보상금과 연금을 받게 됐지만 그를 잃은 아픔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그가 사망하고 나서 한 달 뒤 아버지(86)도 세상을 떠나 가족들의 슬픔을 더 크게 했다.
쌍둥이 형 재송(43)씨는 “동생은 10여년 동안 명절 때 고향에도 내려오지 못할 정도로 열심이었다”며 “지금도 소방차를 보면 동생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다”고 말했다. 그는 “동생은 그나마 딸린 식구가 없어 다행”이라며 “순직 공무원들의 자식들이 가슴을 펴고 살 수 있도록 나라가 뒷받침을 잘 해 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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