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 대선 레이스의 히든 카드로 검토해온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과연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을까. 여권의 영입 대상‘0순위’로 급부상한 정 전 총장이 자신의 거취에 대해 미묘한 입장 변화를 보이는 듯한 언급을 하고 있어 그의 정치 참여 여부에 촉각이 모아지고 있다.
정 전 총장은 21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정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여전히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는 “여권의 상황을 보면 답답하고 걱정이 된다”고 말해 거취 변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최근 3개월 동안 그의 발언들을 추적해보면 그가 대선 출마 가능성을 완전 차단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 전 총장은 9월28일 서울대 정치ㆍ외교학과 총동창회 초청 간담회에서 “나는 대통령감이 못된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뒤 “뒤에서 훈수 두는 일은 적극적으로 할 생각”, “‘아직’은 정치를 생각해 본 적 없다” 등의 말을 하는 등 뉘앙스가 조금씩 바뀌었다. 급기야 20일엔 정 전 총장이 “정치를 안 한다고 단언하지 못한다”고 말했다는 방송 보도까지 나왔다.
여권에서도 그의 출마 가능성을 점치는 관측이 많다. 열린우리당 김한길 원내대표는 이날 “정 전 총장이 그런(대선 출마)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본다”며 “경제가 중요하다고 하니까 경쟁력이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재선 의원도 “ 정 전 총장은 조건과 상황만 만들어진다면 대권에 도전할 의사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여권 관계자들은 정 전 총장을 영입해 고건 전 총리와 경쟁을 시킨다면 흥행 등 여러 면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경제학자인 정 전 총장은 학자로서 기존 정치권에 몸을 담지 않은 참신함과 경제 이미지가 큰 장점인 것은 분명하다. 합리적 개혁 성향 이미지를 갖고 있는 충청권 출신이어서 여권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 카드로 거론된다. 반면 정치권에 지지 세력이 없다는 것과 검증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은 약점이다. 서울대 총장 외에 마땅한 국정 운영 경험이 없다는 것도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본보와의 통화 내용.
_정치를 할 생각이 있나.
“그만 좀 괴롭혀라. 가만히 있는 사람 자꾸 흔들어댄다. 말하는 단어 하나 바뀔 때마다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도된다. 정치에는 정말 관심이 없다.”
_여권에서 권유하지 않나.
“직접 와서 얘기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
_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과 가까운 사이인데.
“가깝지만 지난 2년 동안 두 번 봤다. 단 둘이 만난 적은 없다. 얼마 전에도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만났는데 정치 얘기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_여지를 남겨두는 것 같은데.
“내가 ‘아직’이라는 말을 쓰니까 여운을 남긴 것이라고 그러는데 그건 평소 내 버릇이다. ”
-1년 뒤 일을 알 수 없으므로 너무 단정적일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런 측면도 있지만….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언론이 여운을 남기는 식으로 쓴다.”
_지금 여권의 상황에 대한 생각은.
“여권 상황을 보면 답답하고 걱정이 된다. 그래도 나는 정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입장에 변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_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보면 안되나.
“언론이 해석해서 그렇게 쓰는 것 아니냐. 알아서 해라.”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고건측 "좋은 경쟁자 있는 건 좋은 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여권의 대안 후보로 부상하는데 대해 고건 전 총리측은 일단은 태연하다. 오히려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최근 여권 일각에서 고 전 총리의 노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나오는데 대해선 경계심도 갖고 있다.
고 전 총리측은 21일 “좋은 경쟁자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했다. 한 측근은 “정 전 총장이 가세한다면 흥행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누가 후보가 되든 본선 경쟁력이 강화되는 것”이라며 “두 사람이 맞붙더라도 고 전 총리가 불리하지 않다”고 말했다. 예선 경쟁에서 밀릴 이유가 없다는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다. 고 전 총리측은 “정 전 총장도 고 전 총리가 추진하는 중도개혁세력 통합의 한 대상”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일부 여당 인사들이 고 전 총리 카드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데 대해선 민감하다. 김근태 우리당 의장이 최근 “(고 전 총리가 주장하는)‘가을 햇볕정책’을 펴 금강산관광 사업을 중단했다면 6자회담 재개로 우스워졌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고 전 총리측은 “고 전 총리는 정부보조금 중단 검토 가능성을 언급한 적은 있지만 금강산관광을 중단하자고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여권, 그 외 흥행카드는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에 대한 공감대가 이뤄진 여권 내에서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 정동영 전 의장, 고건 전 총리, 그리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 함께 출마 가능 인사로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은 박원순 변호사와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이다. 이 정도 진용은 돼야 오픈 프라이머리가 흥행에 성공할 있을 것이란 지적들이다.
시민운동 1세대인 박 변호사는 특정 정파에 치우치지 않은 채 ‘아름다운 재단’을 비롯한 공익활동에 매진해온 점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문 사장의 경우 환경ㆍ윤리ㆍ지식경영 을 도입한 데서 볼 수 있듯 경제와 환경, 윤리 등 ‘21세기 키워드’를 두루 섭렵한 게 강점으로 꼽힌다. 우리당의 한 중진의원은 “두 사람 모두 정치권 전반에서 두루 신망이 높아 정치 입문시 파괴력이 상당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5ㆍ31 지방선거에서 고배를 마시긴 했지만, 강금실 전 법무장관과 진대제 전 정통장관에 대한 선호도도 적지 않다. 강 전 장관은 서울시장 선거 막바지에 여권 지지자의 심금을 울리면서 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 받았고, 진 전 장관이 갖고 있는 첨단기술ㆍ디지털 이미지가 한나라당 후보들과 비교해 경쟁력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치권 인사로는 천정배ㆍ김혁규 의원이 각각 개혁과 영남 대표성을 내세우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과 각별한 유시민 복지장관의 행보도 관심사다. 최근 들어선 한명숙 총리를 주목하는 이도 많다. 북한 핵실험을 전후해 재향군인회 방문을 비롯한 안보 행보를 지속한 데 이어 정계개편 논란에 대해 “정치꾼은 항상 다음 선거만 생각하지만 올바른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한 말이 정치적 해석을 낳고 있다.
양정대 기자 torch@hk.co.kr
대선 뛰어든 비정치인
역대 대선 출마자는 대부분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에 비(非)정치인이 대선 도전을 시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치 신인들은 중간에 다크호스로 등장하기도 했으나 대선 끝까지 완주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본선까지 간 경우에는 양강 구도에 끼지 못하고 제3세력 후보에 머물렀다.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2년 1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국민당은 그 해 3월 총선에서 31석을 획득하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반값 아파트’ 등 파격적 공약을 내걸면서 한때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결과는 3위 낙선이었다. 그는 낙선 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었던 김우중씨도 대선 출마를 시도했으나 김영삼 민자당 후보 등의 압력에 밀려 정치 참여를 포기했다.
97년 대선 때는 정치 경험이 거의 없었던 이수성 전 총리와 조순 전 서울시장이 출사표를 던졌다. 서울대 총장 출신인 이 전 총리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간접 지원을 바탕으로 이회창 후보의 경쟁자로 부상하기도 했으나 TV토론 과정에서 지지도가 급락하더니 결국 당내 경선에서 탈락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지낸 조순 전 서울시장은 95년 민주당에 입당,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이후 민주당은 DJ 주도의 국민회의와 민주당으로 쪼개졌고, 조 전 시장은 97년 7월 시장직을 중도 사퇴하고 민주당 대선후보가 됐다. 하지만 조 전 시장은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이회창 후보가 이끄는 신한국당과 통합해 한나라당을 만드는 길을 택했다.
신재연 기자 poet33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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