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첫 문장을 만났나요?
경란 씨! 11월도 중순이 넘어가는군요. 이 가을의 막바지, 저는 원주의 토지문화관 창작실에 머물고 있어요. 이곳은 집필을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제게는 요양의 의미가 더 큰 곳 같습니다. 삼시 세 끼 유기농 채소를 곁들인 밥과 새로 건축한 따스한 숙소. 그리고 금방이라도 막힌 머리를 뚫을 듯한 청량하고 맑은 공기와 햇빛.
저는 오전엔 이곳 근처의 등산로와 산책로를 두 시간 가량 다녀오곤 합니다. 며칠 전 이곳이 너무 좋아 그대에게 문자를 보냈지요. 얼마 전에 집필에 몰두할 곳을 찾기에 말이죠. 원고마감을 못했는지 답은 없고 전화기는 꺼져 있더군요.
우리가 처음 만나 3개월여를 함께 보낸 미국의 아이오와시티. 그대와 나, 우리 두 사람은 참으로 다른 점이 많은 작가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래 그런지 우리 두 사람은 요철처럼 잘 맞기도 했지요. 창작 스타일이나 창작 습관, 심지어 식성과 잠버릇까지도 너무 다른 우리가 작가로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 건 우리들 안에 있는 상처와 고통을 엿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작가인 우리는 고통 민감증 환자인지 모릅니다. 저는 가끔 이렇게 말합니다. “상처는 나의 힘. 나는 고통을 잉크 삼아 글을 쓴다.” 그래 그런지 아주 고통스러울 때 글을 쓰는 일이란, 마치 고통의 피고름이 가득한 심장에 펜을 콕 찍어 글을 쓰는 듯 심장의 동통마저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 고통의 잉크도 준비 되어 있고 심장에 펜을 콕 찍어 쓸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선배, 저는 여태 첫 문장을 기다리고 있어요.” 지난 여름 독일에 머물던 그대에게 안부 메일을 했을 때, 그대의 답신이었지요. 작가에게 첫 문장이란 무엇일까요? 작가에게 글을 이끌어낼 첫 문장이란 어떤 운명적인 만남과 같은 것이겠지요.
작가는 자기 글과 한바탕 사랑에 빠지는 사람입니다. 첫 문장은 운명의 미로를 헤치고 달려갈 열정의 첫 발자국. 첫 문장은 청동갑옷 속에 갇힌 작가의 의식을 자유롭게 할 첫 단추입니다.
작가들이 어떻게 첫 문장을 만나게 되는지 저는 무척 궁금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 또한 첫 문장이 떠오르면 일사천리 달려가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펜을 들고 오래 기다립니다. 그대에게 어제 다시 문자를 보내보았습니다.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아마도 첫 문장을 만나 혹독한 사랑을 치러 낼 그대의 모습이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경란 씨. 이곳엔 얼마 전 채 단풍도 들기 전에 내린 첫눈 때문인지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길.
2006. 11. 16 권지예
● 김다은의 우체통
새 작품에 대한 영감 기다리며
권지예는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뱀장어 스튜> 의 작가다. “뱀장어 스튜(La maelote d'angilles).” 제목과 동일한 첫 문장으로 써놓고 그는 다음 문장들이 달려 나오길 기다렸다. 영 소식이 없었고 침묵은 2년이나 계속 되었다. 뱀장어>
권씨는 “뱀장어들이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모습에서 고여 있는 열정, 몸 안에 가두어져 있는 열정을 본다”고 했다. 그 이미지는 바로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며 온몸으로 견디는 자신의 모습이다. 이 편지는 그런 “기다림이 몸처럼 길어서 슬픈 짐승”의 시간에 쓴 것이다. 어쩌면 첫 문장을 찾느라 마찬가지로 무소식인 경란씨에게. 그리고 또 다른 경란 씨, 바로 비슷한 처지의 모든 작가에게. 김다은(소설가ㆍ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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