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PC방에 디스켓을 갖고 가서 인쇄를 하려는데 뜬금없이 포맷하라는 지시가 모니터에 떴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래나 뒤숭숭했지만 아쉬운 건 나여서 포맷이라는 걸 해보려 했다.
그런데 컴퓨터가 지시하는 대로 어렵사리 따라갔더니 막판에 '포맷을 하면 저장된 데이터가 지워집니다'라는 글자가 뜬다. 어쩌란 말이야? 약이 올라서 주인을 찾았지만, 나만큼이나 컴맹인 그는 내 눈길을 피하며 안절부절. 겨우 프린트 몇 장 할 거면서, 적성에 맞지 않는 일터에 있는 그를 꽤나 괴롭힌다.
나는 며칠 새 변심했든지 변신한 컴퓨터를 안타까이 들여다보다 자리를 떴다. 굶주린 표범이 호숫가에서 거북이를 만나는 TV 야생동물 프로그램 장면이 문득 생각났다. 껍질 속에 웅크린 거북이한테 침을 잔뜩 묻혀 놓고 더 허기진 얼굴로 어린 표범은 발길을 돌렸다.
막막히 헤매다 '토너 잉크 충전'이라 유리문에 적힌 가게를 발견했다. 다짜고짜 들어가 부탁했더니 프린트를 뽑아줬다. 고맙기 짝이 없었다. 가게주인은 점잖게 손사래를 치며 프린트 값을 거절하고 온화하게 말했다. "다행입니다. 이제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는데요." 시계를 보니 밤 아홉시를 막 지나고 있다.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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