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장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이루어 놓은 아담 스미스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의 '왕의 거리(Royal Mile)'에서 잠들고 있다. 그는 허치슨, 흄과 같은 당대의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학문하던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대학과 에딘버러대학에서 배우거나 가르쳤다.
● 옥스퍼드대에 실망한 아담 스미스
그가 한때 이름만 높았던 옥스퍼드대학에 공부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크게 실망하고 만다. 글래스고대학의 활기찬 강의와는 달리 옥스퍼드대학에서는 가르치려는 시늉조차 찾기 힘들었다고 스미스는 말하고 있다.
그곳에서 교수들은 아무렇게나 강의를 해도 월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국가에 의해 운영되는 대학이다 보니 관청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의 역작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글래스고대학과 에딘버러대학의 자유로움은 오늘날의 사립대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에서 사립학교의 기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지금도 대학교육의 80%를 사립대학이 감당하고 있으며, 이들이 없었더라면 일제 하에서 민족정신이 어떻게 지탱되었겠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중등교육도 마찬가지다.
일제시대에 선각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립학교 뿐 아니라, 해방 후 국가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때에 교육사업에 재산을 털어넣어 필생을 교육발전에 기여했던 교육자들이 있었기에 인적자본에 기초한 오늘의 우리 경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획일적인 공립 또는 국립학교 체제가 아니라 제각기 다른 사학들의 건학정신에 따라 자유로운 교육 분위기가 주어져 있었을 때 우리의 교육은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에 개정된 사학법은 사학의 정신이 쉽사리 훼손될 수 있는 독소 조항을 가지고 있다. 바로 개방이사제 조항이며 또 임시이사 파견제도이다. 사학의 건학정신과 전혀 무관한 인사들이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으며, 또 이들로 인해 쉽사리 조성될 수 있는 혼란을 이유로 교육부의 자의적 판단('학교법인의 정상적 경영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 임시이사를 파견한다고 규정)에 따라 얼마든지 임시이사를 파견할 수 있게끔 제도화한 것이다.
사학재단의 비리를 막기 위해 그런 조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학재단의 비리가 있다면 이는 물론 척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비리의 척결은 현행 법규로 얼마든지 가능하며 또한 옛날과 같은 재단 비리는 오늘날 결코 흔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사학법이 개정된 대로 시행된다면 사학의 활기찬 교육활동은 더 이상 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누가 더 이상 사학을 위해 투자할 것인가? 또 사사건건 개방이사들과의 의견다툼 때문에 얼마나 많을 에너지가 소모될 것인가? 또 임시이사가 파견된다면 그 학교의 건립정신은 어떻게 보장될 것인가?
● 사학의 창의성 북돋아주는 정책을
다행히 여당이 개방형이사제를 수정할 의사를 표출하였다고 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개방형이사 추천을 여러 학교 관련 기구로 확대할 뿐 아니라 가족에 의한 학교 운영이 아닌 준공적(準公的) 조직(예컨대 종교기관 등)에 의해 운영되는 경우에는 이미 개방형 이사제가 확립된 것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임시이사 파견의 조건도 보다 구체화하여 자의성을 축소해야 할 것이다. 법규에 무엇이 정상적 운영이 아닌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육의 생명은 창의성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붕어빵 만드는 학교들이 나라 경제를 망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창의성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증진된다.
아담 스미스가 자유로운 스코틀랜드의 분위기 속에서 창의성을 발휘한 것처럼 우리의 사학들이 사학의 건학정신을 살리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학생들의 창의성을 키울 수 있게 하는 교육정책이 절실하다.
이영선ㆍ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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