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온갖 사건과 사고의 와중에도 자신을 던져 사회에 빛을 전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나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아무 대가 없이 온몸을 바쳤거나 크게 다쳤던 사람들, 그들의 자기 희생과 교훈을 돌아본다. 편집자주
자신을 잊고 몸을 던진 사람들이 있다.
2006년에도 나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아무런 대가 없이 낯선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크게 다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의사상자(義死傷者)들의 자기 희생과 그들이 남긴 교훈을 돌아본다. 편집자주
자신을 잊고 몸을 던진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다. 모르는 아이라도 우물에 빠지면 불쌍히 여기고 구하려는 마음이다. 그러나 실천은 쉽지 않다.
2006년에도 나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아무런 대가 없이 낯선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크게 다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의사상자(義死傷者)들의 자기 희생과 그들이 남긴 교훈을 돌아본다. 편집자주
5월 5일 경기 수원비행장. 공군 제8전투비행단 제239 특수비행대 블랙이글스(대장 김진호 중령) 대원 6명은 어린이날 맞이 에어쇼를 위해 애기(愛機)와 함께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어린이들의 탄성 속에 에어쇼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오전 11시51분. 고 김도현 소령(33ㆍ공사 44기)은 나이프 에지(Knife Edge)를 시도했다. 2대의 비행기가 마주 날아가 360도 회전한 뒤 수직 상승하는 고난도 기술이다. 300m 간격을 유지하지만 조종사들 눈에는 칼날 정도 거리로 비껴가는 것으로 느껴진다 한다.
관람객 사이에선 한순간 정적이 흐르다 ‘악’하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 소령이 탑승한 6번기가 치솟지 못하고 갑자기 기우뚱하더니 관람석 저편 활주로로 떨어졌다. ‘꽝’하는 폭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피어 올랐다.
추락한 A-37B기와 함께 산화한 김 소령의 왼손은 스로틀(엔진출력 조절레버), 오른손은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그가 탈출을 포기하고 조정간을 굳게 쥔 이유는 무엇일까. 죽어도 민간인 희생은 막아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동료인 김태일 소령은 “조종사들은 추락 시 어떤 일이 있어도 민가와 관람객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관람객 가까이에서 저공비행을 하는 에어쇼는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비행기와 생을 같이한다는 마음자세로 하늘로 향한다고 한다. 김 소령의 희생은 어린이 등 관람객 1,300여 명의 안전과 맞바꾼 것이었다.
어버이 날인 5월 8일 영결식장에서 비뚤비뚤한 글씨로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라는 그림카드를 영전에 바친 맏아들 건우(4), 아빠의 영정사진에 ‘필승’이라며 거수경례했던 태현(3)이는 이제 서울에서 살고 있다. 엄마 배태안(30)씨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해 아빠와의 정과 추억이 어린 강원 원주시를 떠났다.
배씨는 “생계를 꾸리며 연년생인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현실 때문에 남편을 잃은 슬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을 때도 있다”며 “갑작스런 변화에 눈앞이 캄캄했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차츰 적응해 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남편뿐만 아니라 명예와 자부심을 가진 군인이라면 누구든 그런 상황에서는 똑같이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소령의 선택은 많은 이에게 ‘희생’의 숭고함을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회사원 장모(38)씨는 “김 소령에게 우리 가족의 생명을 빚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 뒤부터 적은 돈이나마 어려운 분들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블랙이글팀은 아픈 기억을 떨쳐 버리고 국군의 날(10월 1일)에 비행을 재개했다. 김 소령의 동료들은 “김 소령이 잠들어 있는 국립현충원 상공을 지나는 순간 팀원 모두 그의 희생정신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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