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 회담 재개를 앞두고 이상하리만치 국내가 조용하다.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짚이는 데는 있다.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해서 북한 핵 문제를 '남의 일'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도 그 동안의 우여곡절을 통해 6자 회담이라는 틀의 실제적 효용에 의문을 느꼈을 만하다. 회담 재개를 위한 북ㆍ미ㆍ중 3각 접촉에서 보듯 한국은 절반의 당사자 지위에 그친다는 현실 인식도 이런 의문을 부추긴다.
문화적 요인도 있다. 북한 핵 문제와 같은 고차 방정식은 풀이과정을 지켜보는 것만도 대단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반면 '역동성', 또는 '조급성' 무늬로 짜여져 있는 한국인의 의식은 긴 호흡이 필요한 문제에 맞닥뜨리면 부지불식 간에 밀쳐둔다.
밀쳐두기 위해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무의식적 경시가 작용한다. 북한 핵 실험이라는 실제상황에서도 핵이 추상적 위협 정도로 치부되는 상황이 그래서 가능하다.
● 핵에도 색깔이 있다?
역사적 경험의 해석도 한 요인이다. 60여 년 전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서 한국인이 접했던 핵은 절대적 공포였다. 그러나 공포의 경험이 전승되는 과정은 한국과 일본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핵 공포가 집단적 경험으로 고착된 반면 한국에서는 피폭자 개인의 경험에 그쳤다. 해방의 기쁨이 핵 공포를 덮었기 때문이다. 핵은 겉으로는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었지만 박정희 시대의 핵 개발 기도가 은근히 칭송되듯, 의식의 저변에는 긍정적 역할에 대한 기대도 숨어 있었다.
북한의 핵 실험을 두고 일부 네티즌이 '민족적 자부심'을 운운한 데서도 핵에 대한 이중적 잠재의식을 읽을 수 있다. 색깔은 좀 다르지만 1960년대 미국과의 핵 군비 경쟁에서 소련이 내세웠던 "제국주의자의 핵과 사회주의자의 핵은 다르다"는 주장을 연상시킨다.
하기야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야 할 대통령이 "북한에 핵 무기가 있어도 한국의 군사력은 우월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지경이니 일반 국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지난해 핵 보유 발언에서 현재까지 북한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우리는 남측에 군사적 위협을 제기할 의도도, 능력도 없다. 오히려 미국과 한국에 심각한 안보 위협을 느껴 군사력을 키워왔으나 경제적 부담 때문에 재래식 전력으로는 대처할 수 없게 됐다.
할 수 없이 최후의 수단으로 핵을 개발, 억지력을 확보했다." 그렇게 애써 개발한 핵이 별 볼일 없는 것이라면 "이제는 경제 문제에 치중할 것"이라고 떠벌릴 수가 없다.
북한 핵이 추상적 위협에 머물 가능성은 흐리다. 북한이 확보했다는 억지력의 실제 효과를 생각하면 불안이 더하다. 북한은 애써 '핵 억지력'이란 표현을 쓰지만 '공포의 균형'에 기반한 전통적 핵 억지론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
북한의 핵은 소규모 핵 전력으로도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면 상대방의 핵 공격을 억지할 수 있다는 '최소억지론'을 적용하기에도 부족하다. 미국 본토를 위협하기 어렵고, 설사 가능하더라도 배후지가 엷은 지리적 특성과 '확증파괴능력'을 확보한 미국의 핵 전력으로 보아 본격적 공포를 제기할 수 없다.
● 공포는 결국 우리 것
따라서 북한이 말하는 '핵 억지력'은 재래식 전쟁 억지력이며, 한국을 1차 목표로 삼는 핵 공격 카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국이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미국이 그런 한국의 위기감에 동조하는 전제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억지 효과다.
나아가 북한 정권의 가장 큰 고민이 외부의 군사적 위협보다는 내부의 체제혼란 가능성이라면 인위적 긴장을 조성하기 위한 소규모 도발의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 때 우리의 대응이 북한의 핵에 의해 제약되리란 점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6자 회담의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최종적 위협의 대상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자각을 버릴 날은 아직 멀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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