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국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ㆍ318쪽ㆍ1만원
외국어의 3인칭에 해당하는 말이 없어 ‘궐(厥)’ ‘궐녀(厥女)’ 같은 요상한 한자어를 쓰던 시대, 김동인은 ‘그’와 ‘그녀’라는 혁명적 대명사를 창조해냄으로써 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날인해 넣었다. 그로부터 대략 100년. ‘그’와 ‘그녀’를 뛰어넘는 대담 발칙한 대명사 한 세트가 발명되었으니, 이름하여 ‘놈’과 ‘년’이더라.
신예 소설가 원종국(34)씨의 첫 소설집 <용꿈> 의 동명 표제작에서 “그는 어젯밤 그녀와 동대문에 갔다 왔다” 같은 범상한 문장은 이제 “놈은 어젯밤 년과 동대문에 갔다 왔다”로 ‘리라이팅’ 된다. 용꿈>
아빠의 서재에서 발견한 <완판본 춘향전> 을 통해 ‘고전 포르노’의 세계에 흠뻑 빠져버린 중학생 소년의 희비극적 성장기를 그린 이 소설은 이런 담대한 발상으로 고립과 해체의 인간조건을 증언한다. 가출이나 본드 흡입, 성적 탐닉 같은 일탈이 이 한 세트의 대명사로 인해 성장소설의 동어반복에서 산뜻하게 벗어나는 게 당돌하면서도 유쾌하다. 완판본>
‘놈’이 엄마의 외도의 소산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후 산산조각난 ‘가짜 스위트 홈’은 정치인이 되려는 아빠의 욕망 덕에 겨우 연명해간다. 집을 뛰쳐나와 PC방을 전전하던 ‘놈’은 게임을 하다 만난 ‘년’의 옥탑방으로 거처를 옮겨 밤마다 <춘향전> 의 <사랑가> 를 읊으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지만, 용꿈을 꾸다 늦잠을 잔 어느날 ‘년’의 어머니가 들이닥치면서 행복은 종결된다. 사랑가> 춘향전>
그를 도둑 취급하며 경찰에 넘긴 것은 오히려 ‘년’. 기성의 부패한 정치ㆍ사회 권력과 온라인 게임 ‘스타크래프트’를 병치시키는 이 소설에서 ‘용꿈’은 ‘개꿈’의 이음동의어일 뿐이다.
작가가 지난 10년간 써온 여덟 편의 단편을 묶은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인간복제시대의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세 편의 ‘믹스언매치’ 연작(<믹스언매치> , <욕망의 수수께끼, 어머니, 어머니> , <슬픈 아열대> ). ‘황우석 사태’로 깊은 정신적 내상을 입은 한국인들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이 소설들은 생물학적 뿌리의 추적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다. 슬픈> 욕망의> 믹스언매치>
죽은 천재 아들을 복제한 노부부, 그들에게 난자를 제공한 여성과 대리모, 복제된 아들과 그의 연인 등이 엮어가는 관계망에서 인물들은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가 하필 피임법이 서툴 적에 수정된 세포덩어리”가 바로 나라는 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한다. 복제되는 것은 추억이 아니라 상처다.
1999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와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연거푸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온 작가는 “첫 소설집을 내게 되었다는 기쁨도 크지만, 이제 다른 이야기들을 새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설렘이 더 크다”고 말했다. 작가세계>
박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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