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계곡 넘어 옥빛 칼데라湖… 쾅! 일상이 분출한다
필리핀 여행 하면 역시 보라카이, 세부, 수빅 같은 이름난 해변 휴양지가 떠오른다. 불과 4시간이면 이글거리는 태양과 에머랄드빛 바다로 둘러싸인 남국의 열기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진미(珍味)도 자꾸 먹으면 질리는 법. 바다 주변만 맴도는 여행 일정에 색다른 체험 코스를 양념처럼 얹어보면 어떨까. 필리핀 여행에선 화산 트레킹을 추천한다. 필리핀은 지금도 22개의 화산이 활동 중인 ‘화산의 나라’다.
1991년 6월12일 폭발한 피나투보 화산은 수도 마닐라에서 차로 2시간이면 갈 수 있어 새벽에 조금만 서두르면 하루 코스 화산 체험이 가능하다. 코스는 초보자나 노약자도 크게 부담이 없는 편. 4륜 구동차를 타고 1시간30분 정도 달린 뒤 거기서부터 2시간 가량 도보로 올라가면 분화구에 도착한다. 트레킹 시간을 40분으로 줄인 새로운 코스도 개발됐으나 올 여름 태풍으로 도로가 유실됐다.
화산 트레킹의 시작을 알린 것은 1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낡은 4륜 구동차의 우렁찬 엔진 소리였다. 차를 타고 베이스 캠프격인 엥겔레스 마을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뽀얀 화산재로 뒤덮인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화산 폭발 이전엔 미군 공군기지였다고 한다. 이젠 활주로를 오르내리던 폭격기의 굉음 대신, 용암이 흘러 울퉁불퉁해진 길 때문에 4륜 구동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차량이 이동하는 길 옆으론 화산재로 뒤덮인 야트막한 언덕이 침식작용으로 반쯤 깎인 채 흉물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어떤 언덕은 화산재가 3분의 2를 덮어 지금의 모습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20세기 최대의 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9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재앙의 진원지였다.
차체에 몸을 부딪히며 차량의 흔들림과 1시간 남짓 씨름하다 보면 더 이상 차량으론 갈 수 없는 곳에 이른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트레킹의 시작. 정상까지는 화산재 길과 계곡의 반복이지만 비교적 완만하다. 허연 먼지가 일어나는 산길을 걷다 보면 어느덧 화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정상에선 둘레 2.5㎞의 코발트색 칼데라호를 볼 수 있다.
피나투보 화산 체험의 덤은 유황온천이다. 계곡 곳곳에서 샘솟는 뜨거운 유황물이 시내를 이루는데, 그 한쪽 물길을 막아 노천 유황온천을 만들었다. 화산 입구에서 차량으로 40분 가량 걸린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유황머드를 온몸에 바르고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돌아오는 길 화산 입구의 스파타운에서 화산재 찜질과 필리핀 전통 마사지를 받으면 여행의 피곤을 말끔히 날려 버릴 수 있다.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2시간 정도 떨어진 따가이따이의 따알 화산도 하루 체험 코스로 적당하다.
해발 700m에 위치한 따가이따이는 날씨가 선선한 편이어서 피서지로 이름난 곳이다. 고지대 길가 곳곳에 별장과 펜션이 지어져 있으며 언덕 아래엔 거대한 따알 호수가 찰랑거리고 있다. 이 호수 안에 떠 있는 작은 섬이 바로 따알 화산이다.
따알 화산까지는 배로 이동하며, 선착장에서 1시간 정도 말을 타고 원시림을 통과해 산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정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피나투보 화산의 칼데라호를 축소한 것 같은 아담한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제대로 화산 체험을 하려면 고생스럽지만 487개의 계단을 딛고 가파른 절벽을 내려가보길 권한다. 아직도 분화구 곳곳에선 흰 연기를 내뿜으며 온천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다. 카누를 타고 호수 곳곳을 누벼본다. ‘호수 속의 화산, 화산 속의 호수’라는 알쏭달쏭한 설명이 이제서야 이해가 간다.
[여행수첩]
필리핀은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해 있는 섬나라다. 북부 루손, 중부 비자야, 남부 민다나오 등 세 개의 주요 섬으로 이뤄져 있다. 수도 마닐라는 루손섬에 위치해 있다. 비행시간은 약 3시간30분. 대한항공, 아시아나, 필리핀항공, 세부 퍼시픽이 인천공항~마닐라 구간을 매주 13회, 11회, 7회, 4회 운항한다.
11월~2월은 섭씨 22~28도로 여행하기에 가장 좋다. 화폐는 페소이며 최근 환율로 1페소는 20원 안팎이다. 하지만 원화를 바꿔주는 환전소가 드물어 달러나 페소로 미리 바꿔 가는 것이 좋다. 시차는 한국보다 1시간 느리다. 전압은 대부분의 호텔에서 110볼트를 사용한다. 언어는 영어와 현지어인 따갈로그어 공용이다. 필리핀은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영어 사용 국가이다.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다. 문의 필리핀관광청 서울지사 (02)598-2290
피나투보ㆍ따가이따이(필리핀)=김영화기자 yaaho@hk.co.kr
'가격·품격 만족' 필리핀 쇼핑
필리핀 여행의 또 다른 ‘감초’는 쇼핑이다. 경쟁국인 ‘쇼핑 천국’ 싱가포르을 따라 잡기 위해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저렴한 가격이 이점인 데다 최근엔 쇼핑의 품격도 차츰 높여가고 있다.
‘몰 오브 아시아’는 올 5월 문을 연 아시아 최대 규모의 쇼핑몰. 면적만 76만㎡에 달한다. 화교자본인 에스엠 프라임 홀딩스 소유다. 4개의 부속 건물에 전세계 유명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같은 브랜드라도 현지 생산한 제품일 경우 한국보다 가격이 싸다. 쇼핑 몰 뒤쪽으로 마닐라베이의 석양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마닐라베이엔 1㎞ 이상 길게 뻗어 있는 해변가를 따라 라이브 카페들이 줄을 이어 서 있다. ‘거리의 악사들’이 팝송부터 헤비메탈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라이브로 선사한다.
‘티엔데시타스’는 지난해 9월에 문을 연 대규모 쇼핑센터. 지역 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어져 비교적 깔끔한 편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450명의 상인들이 지역 특산품과 의류, 액세서리, 앤티크, 수공예품, 가구 등 각종 상품을 판매한다. ‘그린힐즈 쇼핑센터’는 필리핀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동대문 시장과 비슷하다. 싸고 질 좋은 물건들로 가득하며 진주숍이 많기로 유명하다.
쇼핑을 마친 뒤엔 마닐라의 대표적 다운타운 지역인 말라테가 가 볼만한 곳이다. 깔끔한 레스토랑, 갤러리, 팝송을 들을 수 있는 바들이 모여있다. 마닐라베이에서 가깝다. 따가이따이에선 허브 농원에서 직접 길러낸 유기농 채소와 빵 등을 내놓는 ‘소니아스 가든 레스토랑’이 젊은층 취향에 적합하다.
김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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