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2가와 3가 사이의 명물 ‘김떡순’을 아시는지? 김밥, 떡볶이, 순대 삼종 세트를 가리키는 말로, 그 동네 길거리 음식의 대표 메뉴다. 질척한 떡볶이 국물은 아침부터 자작하게 졸아들어 김밥이며 순대를 찍어 먹는 소스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종이컵에 떠 주는 오뎅(어묵) 국물 한 잔이면 순간이나마 추위를 잊을 수 있다. 겨울 밤거리의 낭만이자 서민들의 속을 채워주는 소소한 즐거움, 길거리 음식.
엊그제는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연탄불에 구운 문어 한 봉지를 꼭 받아 들고 엄마, 아빠, 여동생과 만족스레 걸어가는 아이를 보았다. 볼이 빨갛게 추워서는 따끈한 종이 봉지 속의 문어 구이에 한껏 신을 내던 여동생과 오빠의 얼굴이 아직도 생각난다.
♡ 롱다리 꼬치 Vs 도나쓰(도넛)
퇴근길에 딱 한 꼬치씩 먹기 좋은 닭꼬치는 이미 길거리 인기 메뉴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적당히 밴 숯불 향에 자르르 윤이 도는 소스가 그냥 지나치기 힘든 냄새를 뿜는다. 소스 때문에 다소 끈적함이 남아있는 꼬치의 한쪽에 냅킨을 싸서 잡고 나머지 쪽에 입을 대서 닭을 빼 먹으면 되는데, 중간 중간에 꼬치를 가위로 잘라 입으로 닭을 빼먹기 편케 해 주시는 주인장들도 있다.
요즘 등장한 업그레이드 버전은 바로 ‘롱다리 꼬치’. 꼬치 길이가 30cm 자보다 길다. 양이 넉넉해서 한 꼬치 먹으면 저녁밥 생각이 안 날 정도. 물가가 비싼 요즘에는 이렇게 양이 넉넉한 먹거리가 반갑다.
종로 3가에는 김떡순과 더불어 명물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도나쓰다. 표준 표기로는 ‘도넛’이라는 외래어로, 가운데 구멍을 뚫어서 튀겨낸 빵이라 하여 북한에서는 아직도 ‘가락지빵’이라 부른다. 종로 3가의 ‘빵박사 아저씨’는 빵 만드신 지 30년이 넘으신 베테랑으로, 아저씨의 도넛을 한 번 먹으면 계속 생각이 난다.
요즘에야 서양에서 직수입 된 도넛 브랜드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만, 완전 옛날식으로 만든 아저씨의 도넛들은 아련한 맛이 있다. 하얀 팥소를 넣어 통으로 튀겨낸 생도넛, 클래식한 모양의 설탕도넛과 꽈배기가 특히 맛있다. 하나에 500원인데, 밤늦게 들르면 남은 도넛들을 더 좋은 가격에 주실 때도 있다. 도넛 하나당 100원씩만 깎아 주셔도 횡재한 것처럼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 계란말이 김밥 Vs 김치전
요리 잘하는 울 엄마의 인기 메뉴 중 하나는 바로 김밥이다. 코리안 시리즈 야구 경기가 있는 날, 가족이 다 모여서 가수인 남동생의 공연 실황을 보기로 한 날에는 어김없이 김밥을 싸 주신다.
엄마 김밥의 키포인트는 일단 밥에 있는데, 고슬고슬한 밥에 살짝 밑간을 해서 김에 마는 것이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간다. 밥뿐 아니라 각기 양념과 조리 시간이 다른 시금치, 당근, 볶은 소고기 등의 재료도 준비를 오래 하신다. 그렇게 싼 김밥이 남으면 내가 다 속상하다. 지난 가을, 친정 아빠와 우리 부부는 삼성과 한화의 결승 게임을 보러 잠실에 갔었다. 어김없이 엄마는 김밥을 잔뜩 싸 주셨고. 쨍쨍한 가을볕에 얼굴이 익는 줄도 모르고 응원을 하던 팀이 결국 9회 말까지 역전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무너지자 우리 셋은 풀이 죽었다.
김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여 많이 남겨 왔는데, 음식 남긴 것을 미안해하는 세 가족에게 엄마는 일요일 저녁 별식으로 ‘계란 지짐 김밥’을 선보이셨다. 냉장고에 잠깐 두었더니 꼬들해진 김밥을 하나하나 계란 물에 적셔서 전처럼 지져낸 것이다. 김밥에 계란 물이 스며들어 다시 부드러운 맛을 내고, 따끈한 온기마저 돌아 여러 개를 먹게 되는 메뉴였다. 여기에 연하게 끓인 무 된장국에 맥주 한 잔씩만 더했더니 일요일 저녁, 내년도에는 우리 팀(?)이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수다를 떠는 식탁이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친정 엄마가 만들어 준 계란 지짐 김밥과 비슷한 메뉴가 길거리 음식에도 있다. 노란 단무지 하나만 콕 박아서 말아 낸 작은 김밥을 계란 부침으로 말아 낸 것이다. 계란을 부칠 때 파를 송송 썰어 섞어서 그 색감이 예쁘다. 껌 한 통보다 조금 큰 김밥을 삼등분으로 잘라 주는데, 그냥 먹어도 기름과 달걀 맛으로 꼬숩고(고소하고) 젊은 애들은 떡볶이 국물에 찍어서 맵게 먹는다.
여기에 대적할만한 메뉴로 김치전이 또 있다. 부침 가루에 김치 국물을 벌겋게 섞어서 만든 김치전은 일단 색이 눈을 잡는다. 어른 얼굴보다 큰 벌건 김치전이 층층이 쌓여 있는 모습에 발길이 절로 멈춘다. 한두 장 사서 집으로 가면 긴 밤을 달래 주는 온 가족의 야식이 된다.
기름진 야식이 반갑지 않으면 연탄불에 구운 문어를 몇 조각 우물거리거나 번데기를 좀 맛보는 방법도 있다. 번데기 좋아하는 나는 번데기를 국물까지 냄비에 넣고 고춧가루, 양파, 청양고추, 다진 마늘 약간에 간장 조금, 참기름 조금, 깨소금 넣어 릴舫릴?끓여 먹는다. 물가 비싼 서울의 연말은 절로 한숨이 난다. 그래도 길거리 음식이든 통조림으로 만든 번데기 탕이든 망에 담긴 귤 한 봉지든 가족끼리 몸을 데울 수 있는 방법들이 아직 남아있어 다행이다.
음식 칼럼집 ‘육감유혹’ 저자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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