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그래서 조약이나 협정이 체결된 뒤에 이와 상충되는 법률이 있다면 마땅히 개폐되는 것이 맞다. 그런데 한미FTA가 만에 하나 체결된다면 얼마나 많은 국내법이 개폐되어야 하는 것일까.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체결시 국내법 10% 개폐 예상
한명숙 국무총리는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외교통상부의 조사를 인용, 미국의 요구가 모두 수용되었을 경우 36개의 국내 법률이 한미FTA와 상충된다고 밝혔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이 얼마 전 국회 통외통위 회의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약 100여개의 법률이 상충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국내법 1,163개 중 대략 10%에 가까운 법률이 한미FTA 체결과 함께 개폐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통상협정 하나 체결하고 국내 법률 10%가 개폐된다면 정부 계획만 놓고 볼 때 향후 수십개의 FTA를 체결할 예정인데 과연 남아날 법률이 몇 개나 될까. 단순한 우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조사한 상충법률 리스트는 오직 국회 특위 소속 의원들과 그 보좌관에만 한정하고 전혀 정보 공개가 되고 있지 않다. 예컨대 '사학법'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법률 하나 만들고 또 그 조항 하나 바꾸는데 얼마나 많은 사회적, 정치적 비용을 들이는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나라의 법이 대량 정리해고(?)될 지경에 처했어도 대다수 국민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자신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알 수 없다.
이러한 사정은 지자체 조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미FTA는 지자체와 공기업에도 곧바로 적용되기 때문에 FTA에 상충되는 조례는 즉각 개폐의 대상이 된다. 얼마 전 민주노동당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자체 조례 중 86개가 상충된다고 하였다. 반면 정부측 조사는 30여개, 청와대는 10여개만이 상충된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가. 현재로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한미FTA 상충법률은 36~100여개, 상충조례는 10~86개 정도이다. 가히 충격적인 수치이다. 차라리 법률공황이라 부르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의 협상 상대국 미국은 어떨까. 반덤핑, 상계관세법, 세이프가드등 미국의 무역구제 관련 법률로 말미암아 매년 15억달러 정도의 대미 수출 손실이 발생한다고 한다.
따라서 한미FTA 협상에서 특히 무역구제 관련법은 초미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번 5차 협상에서 정부측은 이전 15개의 요구목록을 대폭 축소, 5개의 요구안을 제시한 바 있다. 어찌보면 알맹이는 빼고, 특히 미국의 법개정 부담 가능성이 낮은 잔챙이만 챙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마저 법개정 부담이 있을 경우 미의회의 강력한 반발은 불가피하고, 최근 방한한 미국 상무장관의 발언 역시 이를 확인해 준다. 기타 우리측의 요구목록에는 미국 국내법 개정과 관련된 것들이 포함된다. 예컨대 미 연안 해운분야의 존스법이 그렇다.
● 상충법률 정보 공개도 안돼
하지만 미 무역대표부는 자국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의회 소관사항임을 들어 협상을 거부해왔다. 기타 전문직 비자쿼터도 이에 해당되고, 투자 관련 대표적 비관세장벽으로 지목돼온 엑슨-플로리오법도 그렇다.
특히 정부조달과 관련해서 미국측은 주정부의 '비합치 조치'에 대한 포괄적 유보를 요구하고 있다. 미-페루, 미-컬럼비아FTA의 해당조항에 동의한 미 주정부의 숫자가 9개에 불과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설사 한미FTA가 체결되더라도 미 주정부는 주법을 이유로 이를 거부할 수 있다.
우리로서는 자칫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다. 또 1994년 제정된 미국의 '우루과이 라운드 이행법'은 세계무역기구(WTO) 규정과 국내법이 상충될 때 국내법이 우선한다고 아예 못박고 있다. 바꿀 생각부터 하는 우리, 하나도 못 바꾼다는 미국. 한미FTA를 그래서 불평등협정이라고 부른다면 과연 과장이라 말할 것인가.
이해영ㆍ한신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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