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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 <41> 부르는 말과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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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 <41> 부르는 말과 가리키는 말

입력
2006.12.12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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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는 남성을 기준으로 여성 동기(同氣)를 가리키는 말이다. 손위 손아래를 가리지 않는다. 그것을 구별하고자 할 때는, 손위 누이는 ‘누나’ 또는 ‘누님’이라 부르고, 손아래 누이는 ‘누이동생’이라 이른다.

그러나 이 말들의 용법은 보기보다 더 섬세하다. 첫 문장의 동사 ‘가리키다’와 셋째 문장의 동사 ‘부르다’ ‘이르다’에 주목하자. 여기서 ‘가리키다’ ‘이르다’와 ‘부르다’는 서로 뒤바꿀 수 없는 말이다. 그러니까 ‘누이’ ‘누이동생’과 ‘누나’ ‘누님’은 서로 다른 층위의 말이다. 원칙적으로, 앞쪽은 가리키는 말 곧 지칭어(reference form)고, 뒤쪽은 부르는 말 곧 호칭어(address form)다.

전혜린(40세), 전철수(37세), 전채린(33세) 삼남매가 있다고 치자. 전철수는 전혜린을 “누나!” 또는 “누님!”이라 부를 것이다. 전철수는 전혜린에게 말을 걸며 ‘누나’나 ‘누님’을 2인칭 대명사 대신 사용할 수도 있다.

“누님이 쓴 글이에요?”라거나 “누나가 쓴 글이야?”처럼. 한국어 화자가 손윗사람과 얘기할 때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이를 호칭 형태의 명사로 대치한다는 건 지난 주 살핀 바 있다. 이 두 경우에 전철수는 ‘누님’보다는 ‘누나’를 쓸 가능성이 훨씬 높다. ‘누님’은 화자와 청자의 나이 차이가 크거나, 둘 사이에 친밀감이 덜 하거나, 화자가 ‘양반 노인네’ 티를 내고 싶을 때 쓰는 게 보통이다. 30대 남성 화자가 세 살 손위의 친누이를 ‘누님’이라고 부르는 풍경은 유교 격식이 짙게 남아있는 농촌 ‘명문가’에서가 아니라면 찾아보기 힘들 게다.

다음, 전철수는 전채린을 “채린아!”라고 부를 것이다. 한국어에서 손아래 친족을 부를 땐 친족명칭 대신 이름을 직접 사용하는 일이 흔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예컨대 상대방이 항렬은 낮은데 나이는 엇비슷하다거나, 손아래이지만 신분이 높을 경우에는 친족명칭에 ‘님’을 붙여 부른다. “아우님!” “조카님!”처럼. 인척 사이에서도 한가지다. 사돈댁 사람을 부를 때는, 상대가 나이나 항렬이 낮은 사람일지라도, 이름으로 직접 부르지 못한다. 그러나 전채린은 전철수의 친누이동생이니, 전철수는 전채린을 “채린아!”라고 부를 수 있다. 또 전철수가 전채린과 얘기를 나누면서 전채린을 지칭할 때는 ‘너’라는 2인칭 대명사를 당당히 사용할 수 있다. “이거 니가(네가) 썼니?”처럼.

(호격조사 ‘아/야’는 성명 뒤에는 붙지 않는다. 그러니까, “전채린아!”나 “전철수야!”라는 표현은, 익살을 떨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사용되지 않는다. 이럴 땐 “전채린!” “전철수!”라고 해야 한다. 성명을 부르는 것은 이름만을 부르는 것에 견주어 청자에 대한 화자의 거리감을 드러낸다. 이름만을 부를 때는 호격조사가 붙는 것이 상례지만, 조사를 빼고 “채린!” “철수!”라고 할 수도 있다. 이때 호격조사의 제거가 낳는 효과는 매우 유동적이다. 그것은, 맥락에 따라, 친밀감과 거리감이라는 상반된 효과를 낳는다. 자음으로 끝나는 이름이 호칭어가 아니라 지칭어로 사용될 때는 접미사 ‘이’가 붙는 것이 일반적이다.

“채린이가 그랬어”처럼. 이 때 접미사 ‘이’를 빼고 “채린이 그랬어”라고 말하면 격식이나 과장의 느낌을 낳는다. 다시 말해 친밀감을 줄인다. 그러나 접미사 ‘이’가 이름이 아니라 성명 뒤에 붙으면, 친밀감이 아니라 경멸이나 비난의 효과를 낳는다. “전채린이가 그랬어”처럼. 그래서, 성명을 다 드러낼 생각이면 접미사 ‘이’를 빼는 것이 덜 도발적이다. “전채린이 그랬어”처럼. 이름이 자음으로 끝나는 방송기자들은 리포트 끝에 제 성명을 말하면서 접미사 ‘이’를 넣으라고 교육 받는다.

“파리에서 엠비시뉴스 전채린이가 말씀드렸습니다”처럼. 방송기자가 제 성명 뒤에 ‘이’를 넣는 것은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라기보다 시청자에게 제 성명의 마지막 자음을 더 똑똑히 알리기 위해서다. 접미사 ‘이’는 지칭어 이름 뒤에만 붙는 것이 원칙이지만, 일부 방언 배경을 지닌 화자들은 이 접미사를 호칭어 이름 뒤에도 사용한다. “어이, 채린이!”처럼. 이 때 접미사 ‘이’는 친밀감을 드러낸다.)

그런데 전철수의 스승이 전철수에게 전혜린과의 관계를 물었다 치자. 이때 전철수는 “제 누이입니다”라거나 “제 손위 누이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다. “제 누님입니다”는 물론이고, “제 누나입니다”라고 대답해서도 안 된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존칭어 ‘누님’을 사용하는 것이 지난주에 살핀 압존법에 어긋나서만이 아니라, ‘누나’나 ‘누님’은, 원칙적으로, 지칭어가 아니라 호칭어이기 때문이다. 스승이 전철수에게 전채린과의 관계를 물었을 땐, ‘누이동생’은 ‘누이’와 마찬가지로 지칭어이므로, “제 누이동생입니다”나 “제 손아래 누이입니다”라고 대답?수 있다.

이렇게 한국어 친족명칭은, 부분적으로, 지칭어와 호칭어를 구별해 왔다. 이를테면 ‘며느리’라는 지칭어에 상응하는 호칭어는 “아기야!”나 “악아!”고, ‘삼촌’이나 ‘당숙’ 같은 숙항(叔行)의 지칭어에 상응하는 호칭어는 “아저씨!”(서남 방언에서는 “아제!”, 서울방언의 낮춤말이나 동남방언에서는 “아재비!”)이며, ‘형수’라는 지칭어에 상응하는 호칭어는 “아주머니!”(서남 방언에서는 “아짐!”, 동남방언에서는 “아지매!”)다. ‘아주머니’는 부모와 같은 항렬의 여성친족을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또 ‘(손위) 동서’라는 지칭어에 상응하는 호칭어는 “형님!”이고, ‘시동생’이라는 지칭어에 상응하는 호칭어는 “도련님!”(미혼의 경우)과 “서방님!”(기혼의 경우)이다.

그러나 현대한국어의 친족명칭에서 지칭어와 호칭어의 구별은 거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많은 경우에, 전통적 지칭어가 호칭어를 대치해 상대를 부를 때 사용된다. “당숙모!” “형수님!”이라는 말은 흔히 들을 수 있어도, 그런 뜻의 “아주머니!”는 이제 들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삼촌!”이나 “당숙!”은 흔히 들을 수 있어도, 그런 뜻의 “아저씨!”는 이제 들을 수 없다. 삼촌이나 형수를 “아저씨!”나 “아주머니!”라고 불렀다간 당사자가 서운해하거나 화를 낼 게다. ‘아주머니’ ‘아저씨’는 친족명칭 기능을 잃고 새로운 의미를 얻었기 때문이다. 여성화자들은, 더러, 제 아이들을 기준으로 삼은 지칭어를 호칭어로 쓰기도 한다. 시누이를 “고모!”라고 부른다거나, (미혼의) 시동생을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예다.

지칭어 ‘누이’는, 비틀기의 맥락에서가 아니라면, 아직 호칭어가 되지 못했다. 제 누이를 일상적으로 “누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명백한 지칭어를 호칭어로 사용하는 것은 상투를 벗어나려는 언어 전술이기도 하다. 예전의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부르며 친밀감을 담아 “아들!” 했던 것처럼. 물론 이 전술도 거듭되면 상투가 된다.) 이와 반대로 호칭어 ‘누나’나 ‘누님’이 지칭어가 됐다. 앞서 등장한 전철수는, 특히 또래 친구들에게라면, “전혜린씨가 내 누나야”라거나 “전혜린씨가 누님이야”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의 기본적인 친족호칭어들은, 은유적으로, 친족 아닌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일이 흔하다. 이것은 다른 자연언어들에서도 더러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한국어의 경우엔 정도가 심하다. ‘형님’이나 ‘누나’나 ‘오빠’나 ‘언니’는 본디 손위 동기를 부르는 말이었고 동기가 아니더라도 같은 항렬의 손위 친족에게나 쓰는 말이었지만, 이젠 나이가 부모만큼 많지는 않은 손위 사람 일반을 친밀하게 부르는 말이 되었다. (‘언니’는, 그 친밀함이 지나쳐, 유흥업소 여성종업원을 무람없이 부를 때 사용되기도 한다.) ‘할아버님’이나 ‘할머님’ 역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을 부르는 말로 뜻이 넓혀졌다.

‘어머님’이나 ‘아버님’도 친구의 어머니나 아버지를 부르는 데 흔히 쓴다. (어린아이의 경우엔, 친구의 어머니나 아버지를 ‘아줌마’나 ‘아저씨’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 어떤 상품을 실제 사용하는 사람은 아이들이지만 그 값을 지불하는 사람은 그 아이들의 어머니나 아버지일 때, 이 상품을 파는 사람이 그 구매자(아이들의 어머니나 아버지)를 “어머님!” “아버님!”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어머님들! 어린이용 내의를 반값에 팔고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의류상의 호객 언어에서 이런 용법의 “어머님!”이 보인다. ‘아주머니’(‘아줌마’)와 ‘아저씨’는, 이런 은유적 용법이 본디 뜻을 몰아내서, 친족을 부를 땐 아예 사용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말들은 원래의 품격을 많이 잃어버려 사용하기 조심스러울 때도 있다. 어린아이들이 제 부모의 친구나 친구의 부모를 부를 때 빼고는, ‘아주머니’(‘아줌마’)나 ‘아저씨’에는 설핏 반말의 뉘앙스가 배어있다.

이런 은유적 용법은 친족명칭 가운데 호칭어에만 적용될 뿐 지칭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 선배 김혜린을 “누님!”이라고 부르는 전철수도, 스승이 김혜린과의 관계를 물었을 때, “제 손위 누이입니다”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칭어와 호칭어가 포개진 친족명칭에서도 마찬가지다. 중년 여성만 눈에 띄면 “어머니!”를 부르짖는 어린이 용품 판매자도, 그 중년 여성을 남에게 소개하면서 “제 어머니십니다”라고 말할 리는 없다.

친족호칭어가 은유적으로 확대된 최근의 예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 ‘오빠’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여성들이 남자 선배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그 이전 세대 여성은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불렀다. 이 ‘오빠’는, 이내, 젊은 여성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애인을 부르는 말을 겸하게 되었다. (거기?맞춰, 젊은 남성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애인을 ‘누나’라고 부르는 관습도 정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 호칭은 연인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부부 사이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젊은 아내는,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위일 경우, 남편을 ‘오빠’라고 부른다.

결혼하기 전에 ‘오빠’라고 부르던 습관이 그대로 남은 탓일 게다. 남자 선배들을 ‘형’이라고 불렀던 세대 여성들 역시, 그 ‘형’ 가운데 한 사람과 결혼하게 된 뒤에도 남편을 ‘형’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저보다 나이 많은 남편을 부르는 말로서 “형!”과 “오빠!”는 하나의 세대 징표이기도 하다. “여보!”는 그 앞세대의 징표일 것이다.

한국어 친족명칭 가운데 고유어로 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한자어 친족명칭을 포함하면, 한국어는 가장 많은 친족명칭을 지닌 자연언어에 속할 것이다. 그 많은 친족명칭들은 ‘가문’을 중시했던 유교적 세계관의 흔적일 테다. 그 세계관 속에서는 친족 사이의 위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을 테고, 그것이 복잡한 친족명칭을 낳았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어의 복잡한 경어체계는 친족명칭과 깊게 연결돼 있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이 친족명칭들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다. 전통 사회의 ‘가문’이 독립적인 핵가족들로 분화한 만큼,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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