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은 6자 회담에서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수준의 북한 핵 동결과 북미 관계정상화를 위한 초기조치를 동시 진행하는 방안을 협의키로 사전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6자회담은 이 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18일께 베이징에서 열릴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당국자는 10일 “재개되는 6자 회담 목표는 한반도 비핵화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핵 폐기 초기단계 조치를 합의하는 것”이라며 “이후 핵 폐기와 이에 따른 5자 당사국 상응조치의 단계적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다른 외교소식통도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북측에 요구한 조기수확(Early Harvest) 조치와 이에 대한 미국의 상응조치를 논의하는 걸로 알고 있다”며 “북측이 실제 핵 동결에 응할지는 분명치 않다”고 말했다.
북측은 제네바 합의수준의 핵 동결 요구에 대해 5자 당사국의 상응조치 보장 등 조건이 충족된다면 전향적 조치를 취할 의사가 있다는 뜻을 중국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측의 관계정상화 초기조치는 영사 교환 및 평양 연락사무소 개설, 대북 무역 및 투자제한 완화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미간 동시진행 조치는 9ㆍ19 공동성명의 행동 대 행동원칙에 따른 것이다.
제네바 합의 수준의 핵 동결이란 영변 5MW흑연감속 원자로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 및 폐연료봉 제조공장의 가동중단과 이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활동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 미국 CNN은 이날 국무부 고위관계자를 인용, 회담의 진전가능성에 대해 “상당한 정도 이상의 가능성(better than fair chance)이 있다는 감이 든다”고 말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지난달 말 베이징 회동에서 미측은 북측에 즉각적 조치로 제네바 수준의 합의를 포함한 5개항을 제시했으나, 북측이 난색을 표했다”며 “이에 따라 중국은 북측의 핵 시설 가동중지 및 IAEA사찰 수용과 이에 상응한 대북 금융제재 해제와 북미ㆍ북일 관계정상화, 경제 에너지지원 등에 관한 검토회의(워킹그룹) 설치를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북한이 중국 중재안에 대한 미국의 수용의사를 확인 후 회담재개에 응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이 핵 시설 가동중지에 대해 약속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회담의 난항이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중국은 이런 상황변화에 따라 16일 회담을 재개할 것을 9일 5자 당사국에 제안했으나, 북한의 내부사정 때문에 18일께 개회하기로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정진황 기자 jhchung@hk.co.kr
美의 속내는 "일단 열어놓고…" 탐색전
미국은 북핵 6자회담 18일 재개 일정을 수용했지만 회담 성과에 대한 섣부른 기대를 경계하고 있다.
국무부 관계자들은 9일(현지시간) 뉴욕채널을 통해 미국 제안에 대한 북한의 반응을 접수했음을 시인하면서도 상세한 내용을 설명하기를 꺼렸다. 다만 그 동안 회담의 실질적 진전을 위한 ‘준비’를 강조해온 미국이 회담 연내 재개에 동의한 것은 일단 북한으로부터 ‘최소한의’긍정적 신호가 있었다는 해석과 연결될 수 있다.
사실 최근까지만 해도 국무부에는 6자회담 연내 재개에 대한 비관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회의적 시각을 보이면서도 회담의 조기 재개가 불발로 끝날 경우, 다음 수순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 지를 놓고 고민해 왔다.
여기에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협상 국면이 지지부진 해지면서 또 다른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포함돼 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만족할만한 준비가 이뤄질 때까지 계속 밀어붙일 것인가, 아니면 핵 폐기 의지를 증명할 북한의 선행조치에 대한 기대수준을 낮출 것인가를 놓고 나름대로 저울질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6자회담 재개와 관련한 선행조치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만족할만한 수준이라는 평가는 미국 정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워싱턴포스트는 미 정부 관계자들은 북한이 회담 재개 시작부터 어떤 구체적인 핵 폐기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미 정부는 6자회담이 재개되면 북한이 9ㆍ19 공동성명을 신속히 이행할 의지가 있는지를 보여줄 증거제시를 계속 요구할 것이라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미국이 기대수준을 낮추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6자회담 조기 재개에 가장 적극적인 중국이 중재안을 냈고 미국이 수용한 것이라는 관측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라크 정책을 수정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 조지 W 부시 정권의 상황이 북핵 문제에서 조기 성과를 낼 필요성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이 핵 폐기 때까지의 단계적 조치에 대한 구체적 시간표를 제시하지 않은 채 막연하게 부시 대통령의 임기에 맞춰 18개월 이내에 핵 문제를 해결하자는 제안을 북한측에 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렇다고 미국이 회담 성과를 위해 북한에 보다 진전된 인센티브를 제공했다는 흔적은 없다. 현재로서는 회담 재개의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 일단 회담을 열어놓고 서로 상대방의 다음 카드를 보자는 탐색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성과를 자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北의 속내는 "일단 열리면…" 양보 기대
북한이 6자회담 복귀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속내는 무엇일까.
중국은 북한과 사전조율을 거쳐 6자 회담 개최방안을 참가국들에게 회람한 것으로 알려졌고, 외교가 일각에선 “북한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 적극적”이라는 소리까지 들린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행보에 대해 최근 미국의 정세 변화와 지난달 말 베이징에서의 북미접촉이 야기한 ‘당연한 선택’이라고 풀이한다.
최근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하면서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사임하는 등 대북강경파의 입지가 좁아졌고, 이라크 사태까지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북한은 지금이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양보를 이끌어 낼 최적기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베이징 접촉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차관보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장에게 구체적 대북제안을 담은 ‘부시 패키지’를 전달하면서 북한이 국제사회에 무언가 대답할 상황에 처한 것. 김성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북한은 미국의 입장이 조금씩 긍정적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 이 기회를 활용해서 자신들이 회담을 주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고려대 남성욱 교수도 “워싱턴이 평양에 여러 가지 공을 던졌기 때문에 북한이 회담에 나가지 않으면 국제적 비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며 “북한은 미국에 다시 공을 넘기기 위해 회담 테이블을 택한 것”이라고 짚었다. 당장 중국의 체면을 세워주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남 교수의 설명.
전문가들은 북한이 사실상 핵 보유국으로서 업그레이드 된 협상위치를 확인 받으려는 것을 6자회담의 목표로 둘 것이라고 예측한다. 특히 협상 공간을 십분 활용해 자신들의 입장을 홍보하고, 설사 협상이 깨지더라도 미국의 대북강경책 탓으로 책임을 전가에 나설 경우 손해날 것이 없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핵포기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에 대해선 아직 회의적 시각이 대체적이다. 회담 재개와 북한의 핵 포기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전성훈 통일연구원 박사는 “핵포기 의사를 밝혔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던 6자 회담의 역사를 돌이키면 북한의 진정성을 믿기 어렵다”면서 “이번 회담의 포인트는 바로 북한의 진의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희 기자 goodnews@hk.co.kr
北·美입장차 여전 난항 예고
당초 연내 개최 전망이 불투명하던 6자 회담이 12월 중순으로 잡힌 것은 협상의 추진력(Momentum)을 유지하려는 당사국들의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의 적극적인 태도가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시기는 상관이 없다. 실질적 진전이 중요하다”는 한미 양국과 “언제라도 회담참가 준비가 돼 있다. 중요한 것은 대북 적대시정책에 대한 미국의 태도변화”라는 북한의 입장이 엇갈리면서 연내 개최가 물건너간 게 아니냐는 게 당사국들 사이의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회담 재개 시기를 늦춰봐야 북미 갈등만 깊어질 뿐 실익이 없다는 판단 아래 줄다리기를 계속하던 북미를 적극 중재한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미국이 제시한 대북 제안에 북한이 일정 정도의 전향적 태도를 보인 것도 동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지난달 말 베이징에서 가진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부상과의 회동에서 비핵화 및 협상의지 확인을 위한 초기조치를 요구했다. 영변 핵시설 가동중지,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수용, 핵 프로그램 신고, 핵 실험장 폐쇄 등 1994년 북미 제네바 핵동결 합의+알파 수준의 5개항 조치가 그것이다. 북한이 응할 경우 관계정상화 등 상응조치도 아울러 제시했다.
이에 대해 최근 북측은 미국이 요구한 5개항의 조치를 전면 수용하지는 않지만, “회담 재개시 조건만 충족되면 절충안 수준의 조치를 취할 용의도 있다”는 의사를 중국에 전달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미국과 조율을 거쳐 9일 오후 회담 재개 날짜를 16일로 지정해 5자 당사국에 회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북측이 내부사정을 이유로 18일께로 역 제안을 해 재개일이 18일이 될 가능성도 높다. 이 과정에서 미국도 대북제안에 대한 북측의 확답을 모두 받아낼 수는 없는 만큼 협상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북측의 ‘조치의향’수준에서 타협을 본 것으로 관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담의 전망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다. 북측이 북미 제네바 합의 수준의 핵 동결조치를 취할 지 여부가 여전히 불확실하고, 궁극적 목표인 핵 폐기 및 상응조치에 대한 북미 양측의 입장차가 확연한 탓이다.
더욱이 미국은 북측이 핵 동결 이상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게 기본입장이기 때문에, 북측이 핵 동결에 대해 과도한 상응조치를 요구하거나 플루토늄 뿐만 아니라 고농축 우라늄 등 모든 핵프로그램의 신고 조치에 난색을 표할 경우 회담은 상당히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북한은 핵 보유국으로서의 지위와 이에 따른 상응조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외교안보연구원의 김성한 미주연구부장은 “북한은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든지, 지금(북미제네바 합의 또는 9ㆍ19공동성명) 이상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자신을 설득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 받으려 할 것”이라며 “회담에 지나친 기대를 갖는 것은 무리”라고 전망했다.
정진황 기자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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