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베이징(北京)을 찾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해 6월 특사자격으로 방북했을 당시 일화를 소개했다. 그 중 인상적인 대목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대북 발언들을 날짜순으로 꿰고 있었다”는 발언이다.
북한을 비난하는 미측 발언이 나올 때마다 김 위원장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북한이 말하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도 공연한 수사가 아님을 말해준다. 이르면 18일 열릴 6자 회담에서도 북한이 운운하는 적대시 정책의 변화 여부가 회담 판을 좌우할 것이다.
●6자회담에 대한 회의적 시각
현재 6자 회담을 바라보는 베이징의 시각은 “회담이 잘 될까” 하는 우려로 가득 차 있다. 북한이 문제를 풀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은 채 우선 회담의 틀을 유지하려는 생각에서 회담장으로 걸어 나오는 반면 미국의 기대치는 매우 높기 때문이다.
미측은 이번에 ‘조기수확’(early harvest)이라는 이름의 한 꾸러미의 대북 제안을 내놓으면서 상당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지난달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에게 영변 핵 시설 등의 가동 중지, 핵 실험장 폐기, 2008년까지 핵 폐기 완료 등을 요구했다. 대신 상당한 당근도 제시했다. 식량지원과 에너지ㆍ경제 지원을 포함해 북미 관계정상화, 평화협정체결에 관한 적극적인 접근도 약속했다.
사실 미국의 대북 요구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핵 실험이라는 극단적인 강수를 쓴 북한의 핵 포기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더 많은 숙제를 해야 한다는 게 미국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해 9ㆍ19 공동성명 당시와 180도 다른 상황이다. 당시 미국은 핵 폐기의 조치에 대한 북미 간 구체적인 합의가 어렵기 때문에 핵 폐기 목표 즉 출구부터 확인하는 공동성명을 마련했다. 입구가 바늘구멍처럼 좁다는 현실을 인정한 공동성명은 핵 폐기의 기한과 구체적인 과정 등을 확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핵 폐기의 입구를 최대한 넓히려는 미국의 새 제안은 현실적으로 버거운 과제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를 의식해 ‘정치적 당근’을 마련했다. 부시 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만나 평화협정에 서명할 수 있다”고 밝히고,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방북할 용의가 있다는 뜻이 북측에 전달된 듯하다. 하지만 북한이 이를 적대시 정책의 전환으로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이다. 라이스 장관의 방북 등은 훗날의 일이어서 북한이 피부로 체감하기 어렵다.
●지난해와 180도 다른 상황
지난달 김계관 부상은 우리측 천영우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을 만나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변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고 한다.
이는 미국이 상징적 수준의 ‘정치적 당근’ 이 아닌 현실적인 신뢰구축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북한의 메시지로 해석된다. 이번에도 “공은 북한에 있다”는 미측의 단골 발언이 회담장을 지배해서는 성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영섭 베이징특파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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