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은 내란죄 아니다" 판결후 옷벗어
“한 마리의 제비로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봄,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유신 말기인 1977년 9월28일 소액사건의 상고범위를 다투는 사건에서 민문기 전 대법관이 소수의견을 굽히지 않는 이유를 시대적 상황에 비유해 설명한 판결문 내용이다. 언제든 시대가 바뀌면 다수 의견이 될 수 있고, 그런 ‘정의’를 지키며 ‘봄을 알리는 제비가 되겠다’는 뜻이다.
본보 취재팀이 역대 대법관들의 전원합의체 판결을 분석한 결과, 2003년 작고한 민 전 대법관이 소수의견을 가장 많이 낸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26건의 전원합의체 형사사건 중 12건(46.15%)에서 소수의견을 내 비율과 건수 면에서 모두 1위에 오른 ‘Mr. 소수의견’ 이었다.
민 전 대법관은 자신이 지키려던 봄을 위해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0ㆍ26 사건 관련자 상고심 재판에서 “내란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소수의견을 낸 6명의 대법관 중 최고 서열로 가장 과감한 견해를 폈다.
“내란죄는 정치 색채가 짙은 범죄이고 실제로 이 사건이 체제 변동과 맞물려 있어 시국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며 “유신체제를 끝내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행위를 일반 살인이라면 몰라도 내란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민 전 대법관은 이 판결 직후 서윤홍 전 대법관을 제외한 나머지 4명과 함께 옷을 벗어야 했다.
그는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45년 일본 변호사 실무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검사로 임용돼 ‘검찰의 꽃’이라 불리는 법무부 검찰과장에 임명됐다가 그만 둔 뒤 법원으로 발을 돌려 대법관까지 올렸다. 퇴임 후에는 인천에서 공증업무를 보며 전철로 출퇴근 하는 등 청빈한 생활을 했다.
●어떻게 조사했나
본보 취재팀은 10월 중순부터 2개월 동안 역대 대법관들과 관련된 신문기사, 자서전, 인물DB 등을 통해 기초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이어 본인 및 가족들과의 개별 인터뷰를 통해 종교와 유학경험 여부, 성장기의 가정환경, 출생순서 등을 파악했다. 또 대법원에 보관 중인 전원합의체 판결문 483건 가운데 소수의견을 추려내 대법관의 가정ㆍ사회 환경과 판결의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와 소수의견이란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사법 행정의 최고의결기구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으로 구성되며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된다. 주로 대법관 4명이 1개 부(部)를 이루는 재판과정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기존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전원합의체가 꾸려진다. 대법관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인원 과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이 때 다수 의견에 포함되지 않은 의견을 소수의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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