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석 지음 / 문학동네 발행ㆍ280쪽ㆍ9,500원
소설가 최인석(53)씨의 새 소설집 <목숨의 기억> 은 생과 죽음의 신화적 물음에 직면한, 아비 없는 소년들의 쓸쓸한 성장기다. 치매에 걸린 조부모나 버젓한 자식이 있는 친척 집에서 윗목의 찬밥처럼 자라는 이 고아 소년들은 예기치 않은 아비와의 대면과 결별을 거치며 생의 이치를 깨친다. 애비는 종이었던 게 아니라 생의 부조리의 현현이었다. 부재를 통해서든 현존을 통해서든 삶과 죽음의 최종심급이 되는. 목숨의>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는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비가 익사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간첩이었던 그의 친구 뺑덕이 아저씨가 자신의 생부가 아닐까 자꾸 의심이 든다. 어느 해거름 어린 ‘나’를 안고 부르던 아저씨의 구슬픈 노래가 목숨의 기억처럼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목숨의 기억> ). “할애비는 한때 살았던 것들에게는 그것이 죽은 뒤에도 모두 생명이 기억은 남는다고 말했다. 목숨의>
나무로 만든 책상이나 마루, 벽 같은 것이 콘크리트나 돌,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보다 따뜻하고 포근하지 않은가? 할애비에 따르면 그것은 한때 나무가 지녔던 생명의 기억 때문이다. 생명은 사라져도 생명의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은 유한하지만 그 기억은 영원하다.”(97쪽)
이모네 순댓국집에 얹혀살던 소년은 어느날 ‘나’를 찾으러 온 초면의 아버지를 따라 남영동의 쪽방촌으로 가 어미의 유골상자를 둘러메고 앵벌이를 다니는가 하면(<미미와 찌찌-盆地에서 노래하는 앵벌이> ), 아버지가 개인택시 면허를 취득한 것이 동네 바보 영득이를 삼청교육대에 팔아넘긴 대가였음을 알게 된 또 다른 소년은 고기를 구워먹다 말고 영득이네 고욤나무 위로 올라가 영득이처럼 노래를 불러댄다( <달팽이가 있는 별> ). 식물인간이 된 아내의 장기를 팔라고 채근하는 아내의 아비는 내가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척척 해치우는 나의 두려운 분신( <내 님의 당나귀> ). 두 눈 부릅뜨기엔 너무 가혹한 삶의 맨얼굴, 아비들은 자꾸 그것을 보여준다. 내> 달팽이가> 미미와>
장편소설 <새떼>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와 소설집 <나를 사랑한 폐인> <서커스 서커스> 등을 통해 “90년대 중반 이후 원한을 통한 노예들의 카니발적 반란을 가장 극단적으로 몰고 갔다”(문학평론가 복도훈)는 평가를 받는 작가는 유년의 뜰로 돌아선 이 작품집에서 소년들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일러준다. 생의 모든 비밀을 이미 다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장이라고 믿는 것은 다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로 고개를 돌리는 고의적 망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소년, 그 얼마나 선득한 이름인가. 서커스> 나를> 이상한> 새떼>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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