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겨울바람에 몸을 잔뜩 움츠려 걷는 귀가 길.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지났는지 그저 속만 헛헛하다. 어디 잠깐 앉을 구석이라도 있으면 막 끓인 국물로 속이나 지지련만. 골목 모퉁이를 도니 말 없는 주인장이 ‘잔술’을 파는 포차가 보인다. ‘그래 잔술로 딱 하나만 마시고 가야겠다’라는 기특한 생각이 드니. 내 앉을 틈을 내어 주고 멀건 국물 한 그릇에 가득 따른 잔술 한 컵을 따라주는 주인장이 고향 계신 어머니처럼 반갑다.
● 소주의 배신
요즘도 잔술을 파냐고 의아해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직도 서울의 뒷골목에는 잔술을 파는 곳이 있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 애주가들은 버스나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잔술 한 잔을 지나치기 힘들다.
사실 잔술이라는 것이 60~70년대에 더 맛있었을 게 사실이다. 그때만 해도 희석식 소주가 처음 선을 보이면서 30도짜리가 우선에, 그리고 몇 년 뒤 25도짜리가 잔으로 팔리던 시절이었다. 소주의 도수는 그로부터 슬슬 내려가기 시작해서 급기야 올 해에는 20도 미만으로 뚝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2006년의 겨울에 마시는 잔술은 좀 싱겁다. 주세법도 있고, 신세대나 여성층을 공략한 마케팅도 좋지만 스믈스믈 낮아지는 소주의 도수가 나는 좀 못마땅하다. 말하자면 진짜 매운 고추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과 같다. 예전에는 풋고추라 해도 맵싸하고 탄탄하니 아작한 맛이 있었는데, 요즘 고추들은 온갖 좋은 영양을 다 주고 키웠음에도 예전보다 덜 맵고 덜 팽팽하다.
물론 산지를 뒤져 매운 청양 고추만 건져다 먹는 내 입맛의 기준에 따른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쨌든 다른 요리 선생님들도 요즘은 맵고 단단한 고추 찾기가 전보다 어려워 졌다고 말씀들을 하시니 뭐 아주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늘 그랬던 맛이 아주 조금이라도 변하면 예전의 맛을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20도도 안 되는 소주를 잔으로 받아 조금씩 아껴 먹은들 ‘카-’소리도 나오지 않고.
게다가 음식의 간은 조미료 등 맛내기 기술의 다양화로 예전보다 더 진해졌기에 그 아쉬움은 더 크다. 속이 횡하고 말 없는 친구가 필요할 때, 잘 익은 총각김치 두어 알을 앞에 두고 탁주 한 잔씩 그득히 마시던 잔술 문화가 70년대의 25도 소주에 자리를 내어 준 지 벌써 30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와인, 값 비싼 양주, 다양한 맛의 맥주 등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술의 종류가 늘어났고, 또 그 늘어난 술의 종류만큼 소주의 경쟁 상대들도 많아졌겠지만 소주의 일등 역할은 ‘서민의 친구’임을, 없는 돈에 한 병만 두고 마셔도 알딸딸할 수 있었기에 우리가 사랑에 빠졌던 것임을 잊지 않아주었으면 한다. 아껴 마시던 잔술 소주의 마지만 모금을 입에 탁 털어 넣었을 때 ‘컥’하고 올라오던 쓴 맛이 그립다.
● 전통주와 꼬냑
그나마 다행 인 것은 안동소주나 이강주와 같은 전통주의 맛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통 증류주인 안동 소주는 안동시에서 ‘안동소주 박물관’을 만들어 홍보할 만큼 시민들의 자부심이 가득 하다. 나 또한 몇 해 전 안동을 찾았을 때 “소주 박물관이 다 있네!”하는 호기심으로 들렀다가 안동 소주의 맛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강주는 또 어떻고. 전주의 토속주인 이강주는 조선시대 상류사회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술이다. 좋은 곡류로 만든 소주에 배랑 생강이랑 계피, 꿀 등을 넣어 만든 술이니 그 향기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강주는 한국 음식에는 물론이고 서양의 음식에도 참 잘 어울리는 맛. 특히 느끼한 서양식 음식을 먹으면서 이강주를 홀짝거리면 배와 계피, 생강의 향그러움이 입안에 남아 있는 기름기를 싹 가셔준다.
도수가 좀 세다 싶은 술로 눈을 돌리자면 위스키나 꼬냑도 있다. 무조건 ‘비싼 술’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할인 마트를 뒤져 잘 고르기만 하면 괜찮은 위스키나 꼬냑 한 병을 집에 소장할 수 있다. 나 역시 바로 얼마 전에 모 할인 마트에서 위스키 한 병과 휴대용 술 통, 잔 두 개를 세트로 하여 3만원 대에 구입했다. 3만 원이라는 가격인 적은 돈은 아니지만, 겨울 내내 몸이 오슬오슬 할 때마다 한 모금, 홍차에 넣어 한 모금 홀짝 거릴 생각을 하면 한 달에 만 원 남짓 꼴이다.
가을에 박스로 사서 먹은 사과가 딱 몇 알이 남아서 껍질 채 툭툭 썰어 버터, 황설탕, 계피로 맛을 내어 조려버렸다. 맛을 설명하자면 집에서 만든 애플파이의 속이랑 비슷하다. 물을 자작하게 넣고 졸이다가 수분이 증발하면 꼬냑이나 사과로 만든 브랜디 등을 한 두 방울 떨궈 주는데, 마지막 향기를 인상적으로 만들어 준다. 황설탕에 사과의 당분이 더해져 꽤나 달달한 맛이 난다. 여기에 꼬냑을 한 잔 곁들이면 프랑스식 고급 디저트로 손색이 없다. 같은 방법으로 배를 요리한다면 아마 이강주에 더 어울리는 맛이 되겠지.
꼬냑이든 이강주든 고량주든 그 맛이 10년, 100년이 지나도록 변치 않아서 좋다. 도수가 낮아지지 않아서 좋다. 변해가는 소비자들의 입맛에 따라 주는 것도 친절한 배려지만, 소비자가 따라올 수 있도록 고집스레 버텨주는 맛도 자주 만나고 싶다.
음식 칼럼집 <육감유혹> 저자 박재은 육감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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