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라도 한문 공부를 해야 하는 계절이 왔다. 매해 연말이 되면, 교수들이 한자를 정하고 언론은 뜻풀이를 하느라 바쁘다. 이 풍속도는 2001년부터 교수신문이 신문에 칼럼을 쓰는 교수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후,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면서 등장했다.
지금까지 '오리무중'부터 '이합집산' '우왕좌왕' '당동벌이(黨同伐異)' '상화하택(上火下澤)'으로 이어져 왔다. 따지자면 이 원조는 일본이고, 일본어는 구조적으로 우리보다 한자를 훨씬 많이 사용한다.
▦ 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는 1995년부터 일반인의 엽서를 집계하여 '올해의 한자'를 발표해 왔다. 고베 대지진이 있었던 95년은 '진(震)'이었고, 식중독 사건으로 요란했던 해는 '식(食)'이었다.
지난해는 지구촌 재앙에 뻗친 사랑의 손길을 상징하듯 '애(愛)'였다. 한 마디로 간결하게 사회현상과 정서를 함축하는, 표의문자 특유의 묘미와 장점을 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교수의 사자성어는 점점 어렵고 생경해지는 대신, 언어적 에스프리(재치, 기지)는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모방의 한계일 것도 같다.
▦ 교수는 원래 한자를 좋아하는지, 이수윤 교원대 교수 역시 사자성어를 빌려 정치를 설명한 적이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와 철학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한자로 엮은 것이다.
보수주의에서 정의로운 이념은 강귀약천(强貴弱賤)이고, 자유주의에서는 약육강식, 민주주의에서는 억강부약(抑强扶弱), 사회주의에서는 약존강폐(弱存强廢)로 요약된다. 천천히 읽어야 의미가 들어오지만, 다행인 것은 특징을 요령 있게 설명한다는 점이다.
▦ 정치인들도 처음 보는 한자를 들이댄다. 올 초 정치권에서 흘러나온 한자는 눌언민행(訥言敏行) 극세척도(克世拓道) 천지교태(天地交泰) 등이었다. 웬만해선 의미도 알기 어렵다. 이쯤 되면 언어의 오염이고 공해가 된다. 교수나 정치인이 국민의 언어생활을 난해하고 퇴행적으로 끌고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고문도 좋고 현대문도 좋으니 제대로 된 시라도 읊어 보았으면 한다.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는 얼마나 다사로운 덕담인가. 설령 국제화 시대에 '올해의 시'로 워즈워드의 영시 한 줄을 소개한다 해도, 그리 시대착오적이지는 않을 듯하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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