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의 프랑스 K2 원정대는 불운했다. 대원 1명은 캠프4가 설치된 7,600m 지점을 통과하다가 심장 마비로 사망했고, 또 다른 대원 1명은 아스콜레 마을로 귀환하던 중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어 버렸다. 캠프4에서 캠프5(8,350m)까지 진출하는 데에는 무려 18일이나 걸렸다. 끔찍한 악천후가 들이닥쳐 전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결국 정상을 155m 남겨둔 지점에서 포기해야만 했다. 피눈물 나는 결정이다.
프랑스 원정대장 베르나르 멜러는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이번 원정은 여기까지다. 이제 철수 작전에 돌입한다.” 캠프5에서 베이스캠프까지 흩어져 있던 모든 대원들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캠프4에서 대기 중이던 단 한 사람의 대원만은 그 때까지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묵직한 배낭을 끌러 새로운 장비를 펼치기 시작했다. 여지껏 히말라야 고산 등반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장비다. 그 대원이 바로 장 마르크 브와뱅(1951~1990)이다.
“특히 브와뱅, 듣고 있나?” 브와뱅은 무전기에 대고 짧게 대답했다. “네.” 원정 대장은 힘든 결단을 내렸다. “너는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산해도 좋다.” 그가 원하는 방식의 하산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행글라이더를 타고 베이스캠프까지 내려가는 것이었다. 브와뱅은 자신이 캠프4까지 지고 올라온 배낭을 풀어 헤쳤다. 무려 25㎏이나 되는 행글라이더용 배낭이었다. 덕분에 그는 다른 대원들보다 몇 갑절의 체력 소모를 감내해야만 했다. 게다가 당시의 그는 고산 등반의 후유증으로 망막 출혈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브와뱅은 눈에서 피를 흘리며 묵묵히 자신의 행글라이더를 조립했다. 당시 캠프4에는 살을 에는듯한 영하의 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안전 벨트를 행글라이더에 고정시키고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자 캠프4에 남아 있던 다른 대원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나만 빨리 내려가서 미안해. 베이스캠프에서 만나.” 브와뱅이 일그러진 얼굴로 씽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제발 그렇게 되길 바래.” 남아 있는 대원들은 못미더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마지못해 인사를 나누었다. 과연 K2의 7,600m 지점에서 행글라이더를 타고 베이스캠프까지 내려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누구도 답할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도였기 때문이다.
브와뱅이 이윽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의 행글라이더가 위태롭게 펄럭였다. 브와뱅은 지체 없이 절벽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는 절벽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내려 버렸다. 당시에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찬탄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가슴을 후려친다. 하늘과 설산 그리고 구름. 인간 따위가 끼어들 틈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 광대 무변의 원시적 공간에 브와뱅이 두둥실 떠 있다. 그 순간의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두려움은커녕 중력의 법칙마저 잊은 채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이다.
브와뱅이 땅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든 곳의 위치는 해발 7,600m. 베이스 캠프가 위치해 있던 곳은 해발 5,000m. 순수한 고도차가 2,600m이니 거의 백두산의 높이에 육박한다. 새가 된 브와뱅은 그 하늘 위를 13분간 활강한 끝에 베이스 캠프에 정확하게 착지한다. 1분에 200m씩 고도를 낮춰가며 히말라야의 텅빈 하늘을 만끽한 것이다.
분명한 사실 하나. 손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로 그보다 빠른 시간 안에 히말라야의 2,600m를 하강할 수는 없다. 그가 안전하게 귀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K2 전체에 흩어져 있던 프랑스 원정 대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길길이 날뛰었다. K2 등정의 실패조차 브와뱅의 공중 하산 작전 성공으로 모두 다 보상 받은 듯 했다. 상상력 풍부한 샤모니의 열혈 모험 청년이 세계 산악계의 무서운 신예로 기세 좋게 솟아오른 순간이다. 브와뱅은 이 놀라운 퍼포먼스로 그 해 영국 정부가 수여하는 ‘국제 용맹 스포츠맨 상’을 탔다.
장 마르크 브와뱅은 대담한 상상력과 지독한 훈련을 통해 ‘극한 스포츠(extreme sports)’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고 그 경계선을 끊임없이 확장시켜 나갔던 놀라운 산악인이다. 그가 남긴 기록과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무어라 형언할 말을 찾기가 힘들다. 그는 최고의 암벽 등반가이자 빙벽 등반가였고, 65도 이상의 경사를 가진 고산의 설사면에서 스키 활강을 즐긴 최고의 극한스키(extreme ski) 전문가였으며, 절벽에서 뛰어내린 다음 낙하산을 펼치는 파라팡트(parapente)와 이를 행글라이더와 결합시킨 패러글라이딩의 창시자였다. 그는 자신의 모험과 등반을 ‘퍼포먼스’라고 부르곤 했는데,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놀라운 수준의 ‘공연 예술’이었다.
그는 알프스의 3대 북벽을 단 하루 만에 모두 해치워 전세계 산악인들의 입을 쩍 벌려놓았다. 그랑드 조라스에 2시간 30분만에 올랐다가 파라팡트를 타고 마터호른으로 이동하고, 마터호른을 4시간 30분만에 올랐다가 다시 파라팡트로 아이거 북벽 밑으로 이동하고, 아이거 북벽을 7시간 30분만에 올라가버린 것이다. 마터호른 연속등반 기록은 더욱 놀랍다. 4시간 10분만에 마터호른 북벽에 올랐다가 행글라이더로 하강한 다음 다시 다른 루트로 정상에 올라가서 이번엔 스키를 타고 내려온 것이다. 1986년에는 프랑스 에베레스트 등정 10주년 기념 ‘퍼포먼스’로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파라팡트를 타고 뛰어내린 다음 베이스 캠프까지 유유히 날아왔다.
브와뱅은 자신의 최후마저 ‘브와뱅답게’ 마감했다. 1990년 2월 17일, 그는 베네수엘라에 있는 세계 최대 높이의 폭포 ‘살토 델 엔젤’에서 뛰어내렸다. 프랑스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위한 ‘퍼포먼스’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가 펼치려던 파라팡트가 작동하지 않아 그대로 추락사했다. 혹자들은 그가 지나치게 매스컴을 의식하는 연예인 같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소년 같이 해맑은 미소만을 기억하고 싶다. 브와뱅은 언제나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요? 당신도 해보세요. 정말 짜릿해요. 온몸의 세포와 신경들이 곤두서서 환희의 노래를 부른다고요!”
●영화‘한계 끝까지 밀어붙이기’
빙벽 등반·절벽 점프·스카이다이빙… ‘브와뱅의 후예들’ 짜릿한 퍼포먼스
장 마르크 브와뱅은 현대 프랑스 산악계의 간판 스타이자 자부심이다. 그가 39세로 타계한 이후 그를 따르던 극한 스포츠의 추종자들이 모여서 만든 영화가 있다. 영어로 되어 있는 원제는 <한계 끝까지 밀어붙이기(pushing the limits)> 인데, 국내에는 그 내용과 전혀 상관 없이 <‘97 K2>라는 엉뚱한 제목으로 출시되어 있다. 한계>
분명히 밝혀두지만 영화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대단히 엉성한 작품이다. 전문 영화인이 아니라 극한 스포츠맨들이 모여서 만든 영화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영화 속에는 장 마르크 브와뱅의 여러 분신들이 나온다. 빙벽 등반, 파라팡트를 이용하여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극한 스키, 스카이 다이빙, 스카이보드 등 극한 스포츠의 전분야가 총망라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다 브와뱅이 사랑하던 종목들이었다.
극한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나온 아마추어 배우들의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올 것이다. 니체주의 빙벽 등반가 마크 드와이트, 산악 스키 텔레마크 턴의 일인자 크리스 피르스베르, 베이스 점프의 달인 도미니크 글레즈, 극한 스노보드의 기린아 에릭 벨랭 등이 벌이는 숨막히는 ‘퍼포먼스’들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장 마르크 브와뱅의 해맑은 미소와 호탕한 웃음소리가 절로 그리워진다.
산악문학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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