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조선도시인 경남 거제시가 한국 조선업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1970년대 초 국내 조선업계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1%에 불과했다.
하지만 30여년이 지난 현재 전체 수주물량의 44.1%를 확보,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거인으로 떠올랐다. 국내 조선업계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초호황을 구가하는 데는 선박건조 실적 세계 2, 3위를 다투는 거제도의 두 조선소,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거제도의 양대 거점은 옥포와 고현이다. 주민들 사이에선 ‘고현=삼성조선’, ‘옥포=대우조선’이라는 등식으로 통한다. 두 조선소의 근로자와 가족이 거제도 전체 인구의 76.5%나 되니, ‘거제도=조선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두 조선소의 올해 수주물량은 이미 2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연 매출액도 사상 처음 11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향후 15년간 물량도 일찌감치 확보했다. 무역대국을 앞장서 이끄는 조선도시 거제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맞춤형 제작은 기본, 선주 감탄은 당연
삼성중공업은 지난 5월 노르웨이의 해양에너지 개발회사 펀클리프사로부터 세계 최대 규모의 드릴쉽(Drillship) 1척을 5억5,000만 달러에 수주했다. 드릴쉽은 최근 해양 분야에서 각광 받는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해상플랫폼 설치가 불가능한 심해에서 원유를 발굴하는 선박 형태의 시추설비다.
이번 수주는 국내 조선업계를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넣었을 정도로 그 의미가 각별했다. 펀클리프사는 드릴쉽을 삼성중공업측에 발주하는 조건으로 건조자금을 손쉽게 조달했다. 이는 대출심사가 깐깐하기로 유명한 유럽 금융시장이 국내 조선업계의 기술력을 인정했다는 증거이다.
삼성은 이를 계기로 10월 말 국내 조선업계 사상 단일 선박으로는 최고가인 6억1,500만 달러(한화 6,035억원)의 드릴쉽을 유럽지역 선주에게서 수주하는 기염을 토했다.
삼성은 최근 전세계에서 발주된 18척의 드릴쉽 가운데 11척을 수주, 시장점유율 61%를 기록할 정도로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2000년부터 5년간 평균 4억7,000만 달러이던 삼성중공업의 전체 해양설비 수주실적도 지난해 15억 달러로 3배 이상 늘어났다. 올해도 이미 18억 달러를 계약하는 등 수주물량이 폭증하고 있다.
4월 말에는 호주의 석유가스 개발회사인 우드사이드 에너지가 발주한 14만2,000톤급 FPSO(부유식 원유생산ㆍ저장설비) 명명식을 가진 후 선주로부터 200만 달러의 특별보너스를 받았다.
한달 이상 공기를 단축(38일 조기 인도)한데다 인도 전 검사에서 선주 지적사항이 ‘0’로 나타나는 등 삼성의 높은 기술력과 열정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현재 이 시설은 호주 서부 유전지대에 투입돼 앞으로 25년간 550m 바닷속에서 하루 10만 배럴 상당의 원유를 생산할 예정이다.
삼성중공업은 전세계에서 발주된 51척의 FPSO 가운데 14척을 수주, 이 분야에서도 세계 1위의 시장점유율(30%)을 지키고 있다.
삼성이 드릴쉽과 FPSO 등 해양설비 분야에서 세계 1위의 위치에 오른 데는 ▦자동화시스템을 통한 최적설계 ▦용접자동화를 통한 생산성 증대 ▦생산관리시스템 혁신 등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정신과 선진 기술력 확보를 위한 꾸준한 노력 덕분이라는 게 국내외 조선업계의 분석이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해양설비 분야는 부가가치가 워낙 높기 때문에 차세대 한국을 이끌 성장동력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선택과 집중, 블루오션이 희망동력
대우조선해양의 최근 수주실적도 눈부시다. 대우는 특히 액화천연가스를 운반하는 LNG선 건조능력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한다. 대우의 LNG선 수주실적은 1992년 1척, 96년 2척에 불과했으나 2001년 10척, 2004년 20척에 이어 올해도 12척을 따냈다. 현재 수주잔량은 36척에 달한다.
LNG선 건조실적도 2004년과 2005년 각각 7척에서 올해 9척으로 늘어나는 등 최근 11년간 34척을 건조했다. 2007년이면 연간 14척의 세계 최대 건조능력을 갖추게 된다. LNG선 건조에 관한한 세계시장을 쥐락펴락 하고 있는 것이다. 대우가 LNG선 건조 분야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선 것은 ‘선택과 집중’을 통한 블루오션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만 해도 LNG선 분야의 선두주자는 일본이었다. 대우는 당시 일본의 전략 선종(船種)이던 모스형 대신 멤브레인형으로 눈길을 돌렸다. 레드오션에서 경쟁하기 보다는 블루오션을 찾아 승부를 걸겠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판단은 적중했다. 화물창이 마름모형인 멤브레인형의 경우 구(球)형인 모스형에 비해 공간 활용도가 높고 바람의 영향도 적게 받아 유지비가 절감되?등 장점이 많았다. 이후 세계 시장의 판도는 멤브레인형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물론 대우의 세계 제패는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우조선은 1989년부터 최근까지 시설투자에 3,500억원을 쏟아 부었다. 막대한 투자는 생산기술 개발로 이어져 원가절감과 건조기간 단축, LNG선 통합자동화시스템(IAS) 및 시뮬레이터 독자개발 등으로 현실화했다. 지난해 3월 스페인 빌바오에서 열린 ‘가스텍 2005’에선 세계 최초로 25만㎥급 극초대형 LNG선 설계기술을 선보이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지난해 1월에는 세계 최초로 ‘LNG-RV(Regasification Vessel)’라는 신개념을 도입, 세계 조선업계의 대변혁을 예고했다. LNG-RV는 기존 LNG선 위에 대규모 저장기지인 LNG 재기화 설비를 탑재, 해상에 정박한 채로 가스를 공급할 수 있는 선박이다.
육상 LNG기지 설치비용은 물론 환경파괴도 줄일 수 있어 전세계에서 수주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지속적인 시설투자와 기술개발로 세계 조선업계 선두권을 확고하게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자만은 금물이다. 세계 1위의 조선대국을 자랑하던 일본이 어이없게 한국에게 무너졌듯이, 최근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분석이다.
조선 전문가들은 “한국 조선업계가 현재는 세계 1위이지만 중국의 매서운 추격으로 10년 뒤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고부가가치 선박에 대한 한발 앞선 연구와 집중투자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제=김종한 기자 tellme@hk.co.kr
삼성중공업 원윤상 상무
“조선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발주처 관리와 우수한 설계인력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삼성중공업 해양기술영업팀장 원윤상(50) 상무는 “조선산업은 수주과정에 변수가 많은 만큼 발주처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관리하느냐가 향후 세계 조선시장 선점경쟁에서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수주조건 제시는 기본이며, 여기에다 완벽한 품질과 차질 없는 선박 인도 등 신용을 지키는 노력이 더욱 강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원 상무는 “한국이 앞으로도 조선산업 세계 1위를 고수하려면 새로운 선종이 탄생했을 때 이를 소화할 수 있는 설계력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며 “설계력이 뛰어난 후속 세대의 단절로 세계 정상에서 밀려난 일본이 좋은 본보기”라고 말했다. 그는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과감한 투자를 통해 인적ㆍ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최적화된 시스템을 구축, 경쟁력을 한단계 더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서운 속도로 한국을 따라오고 있는 중국에 대한 경계심도 늦추지 않았다. 원 상무는 “중국의 경우 탄탄한 내수경기에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거세게 추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거제도의 경우 조선산업이 발달할 수 있는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4,000여명의 외국인 엔지니어들을 위한 언어소통과 교육, 의료 등 기본적인 인프라가 열악해 점차 이탈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윤 상무는 “이 같은 문제를 극복하려면 정부나 자치단체가 외국인 기술자들을 위한 국제학교와 병원 설립을 허용하는 등 편의시설 조성에 좀더 신경을 써야 한다”면서 “조선 분야 기초연구센터의 설립 등 체계적인 조선산업 육성정책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거제=글 김종한기자 tellme@hk.co.kr사진 이성덕기자 sd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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