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대전 A중학교 3학년 교실. 20대 초반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여교사가 영어수업을 하고 있다. 이날 수업내용은 해외여행에 필요한 출입국 카드 작성법. 일부 학생은 원어민교사의 말을 알아 듣지만 상당수는 여러 번 설명해도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쳐다만 본다. 학생들의 표정을 읽은 원어민교사도 난감한 듯 얼굴이 빨개진다.
한 학생이 “I don’t know. Pass!”라고 소리치자 수업분위기가 금세 어수선해졌고 원어민교사는 어쩔 줄 몰라 한다. 결국 한국인 교사가 나서 수업 분위기를 다잡았다.
인근의 B중학교도 미국인 여교사와 한국인 여교사가 함께 수업 중이다. 학생수 역시 40명에 가깝다 보니 원어민교사와 학생들의 1대1 대화는 불가능했다. 원어민 교사와 학생들의 의사소통도 계속 막혔다. 45분 수업을 마친 원어민교사는 피곤한 듯 교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자리에 풀썩 엎어졌다.
●무작정 선발에 형식적 수업
법무부와 교육인적자원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외국어 강사 자격을 부여하는 E2비자를 통해 입국한 영어권 외국인은 1만2,440여명으로 이 중 1,950여명이 학교 원어민교사로 활동중이다. 전국 1만여 초중고교가 대부분 원어민 교사를 원한다고 볼 때 턱없이 적은 숫자다.
우리나라에 원어민 교사가 도입된 지 10여년이 지났는데도 이처럼 원어민 교사가 턱없이 부족하고 해마다 부실교육 시비가 되풀이 되고 있는 이유는 원어민교사를 담당하는 체계적 시스템 없이 시도교육청이 제각기 수급에 나서기 때문이다.
문제는 학교여건이 좋고 예산지원이 뒷받침 되는 서울 인천 경기는 비교적 양질의 교사를 확보할 수 있는 반면 대부분 지방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떨어진다.
교육인적자원부는 한국교원대에 위탁해 원어민교사초청사업(EPIK)을 운영하지만 폭증하는 원어민교사 수요를 맞추지 못해 일선 교육청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해 이 사업에서 탈퇴했으며 경기도교육청 등도 내년 탈퇴할 예정이다.
전남도교육청 관계자는 “예산까지 확보해 놓고 원어민 교사를 요청했지만 뒤늦게 EPIK쪽에서 공급불가를 통보해 황당했다”면서 “EPIK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원어민 교사를 조달하는 것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황당한 경우는 또 있다. 경기도교육청은 최근 280쪽에 달하는 원어민 보조교사 채용관리업무편람을 펴내 각급 학교에 배포했다. 일선 학교와 지자체로부터 원어민교사를 구해달라는 요구가 잇따르자 이를 돕기 위해 발간한 것이다. 정부차원의 원어민 교사 수급 시스템이 부실하다 보니 일선 시도교육청이 자구책 마련에 나서는 것이다.
●주관기관 없고 예산지원도 전무
이처럼 시도교육청이 원어민교사 수급을 전담하다 보니 갖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1,2명의 장학사가 100여명 안팎의 원어민교사 선발과 배치, 관리까지 책임지다 보니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장학사들은 일선 학교에서 원어민교사를 배치해 달라는 요구가 있을 경우 인력회사에 1인당 120만∼150만원에 달하는 수수료를 주고 원어민교사 수급을 요청한다. 인터넷이나 영자신문에 광고를 내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확보한 원어민 교사는 간단한 인터뷰만 거쳐 선발된다. 영어를 전공하지 않은 교사나 장학사가 원어민을 영어로 인터뷰해 실력을 검증하니 제대로 된 평가가 있을 리 만무하다.
경북도교육청의 한 장학사는 “원어민교사의 70% 가량을 인력회사를 통해 채용했다”면서 “서류검사와 간단한 질문 몇 마디가 사실상 이들을 검증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 원어민교사들은 학원강의를 병행하면서 불성실한 수업에 무단결근을 일삼기도 한다. 또 한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귀국하거나 성추행 절도 등 범죄까지 저지르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
●국내교사 육성 병행해야
교육계는 “1명의 원어민교사를 쓰는데 대략 연간 5,000만∼6,000만원이 든다는 것을 감안하면 한해 1,000억원이 넘는 돈이 낭비되고 있는 셈”이라면서 “정부주도의 시스템 구축과 전문가 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경기도교육청 황익중(53) 장학관은 “국내 원어민교사 관련 논문이 하나도 없을 만큼 원어민교사는 제도권 밖에 놓여 있다”면서 “원어민교사의 장점이 큰 만큼 활용방안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와 함께 국내 영어교사의 육성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1년이면 떠나버리는 원어민교사를 무작정 도입해 시행착오를 반복하기 보다는 해외연수 등을 통해 국내 교사를 활성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이 이 같은 국내교사 육성으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범구기자 goguma@hk.co.kr대전=전성우기자 swchun@hk.co.kr
세계적 명성 JET운영 일본서 배워라
일본의 원어민교사 관리ㆍ운영 프로그램인 JET(Japan Exchange and Teaching)는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1987년부터 시행된 이 프로그램은 외무성이 원어민교사의 선발과 오리엔테이션을 담당하고, 총무성과 문부과학성은 교사 배치와 재교육을 맡고 있다.
외무성은 해마다 지자체로부터 필요인원을 접수받아 현지 대학교를 찾아가 JET프로그램 설명회를 열거나 이 프로그램 수료자로 구성된 협회를 통해 양질의 교사를 확보한다. 현재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은 6,000여명에 달하고, 총 수료자도 50개국 4만6,000명에 이른다.
경기도교육청은 지난 해 이 프로그램 일부를 벤치마킹해 3월부터 장학관과 장학사, 원어민 교사 상담직원 등으로 대외협력팀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채용광고나 인력수급회사를 통해서는 양질의 교사를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도교육청은 미국과 호주 등 5개 대학과 원어민교사 채용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 올해에만 미 위스콘신대에서 110명의 졸업생을 원어민교사로 채용했다.
도교육청 박정기 장학사는 “경기도내 원어민교사는 한 학기 한번은 반드시 공개수업을 해야 한다”면서 “사전연수와 애로상담, 워크숍 등을 주기적으로 실시해 원어민교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범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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