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합니다. 잠시 음주 단속 있겠습니다.”
5일 새벽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내부순환도로 홍제램프 부근. 차량 운행이 뜸한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BMW가 경광등 불빛을 보고 멈춰 선다. 멈칫멈칫 운전석 유리창이 내려오고 긴장한 표정의 남자가 음주측정기에 숨을 내뱉는다. ‘삐삐-’ 경고음과 함께 측정기 표시창에 0.139라는 숫자가 찍힌다.
“선생님께서는 도로교통법 44조를 위반하셨습니다. 음주측정에 이의가 있을 경우 혈액채취를 하실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불콰한 얼굴로 차에서 내린 40대 남자는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딱 맥주 두 잔밖에 안 마셨다”며 오히려 경찰을 윽박질렀다. 적반하장의 세태가 몸에 밴 듯했다. 운전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하던 서대문경찰서 교통지도계 이병대(55) 경위는 “알았으니 서에 가셔서 말씀하시죠”라며 공손한 목소리로 운전자를 진정시킨다.
30분쯤 지나자 홍제천 쪽에서 달려오던 아반떼 운전자가 단속반을 보고는 차를 버리고 뛰기 시작한다. 추격조로 대기하던 구창현(42) 경사가 순찰차를 몰고 뒤쫓는다. 하지만 운전자는 열쇠를 차에 꽂아둔 채 주택가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구 경사는 이날 새벽 비슷한 숨바꼭질을 세 번이나 더 해야 했다.
거리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하나 둘 불을 밝히고 각종 연말 모임과 연회로 바쁜 시즌이 찾아왔다. 아울러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경찰과 술취한 운전자들의 실랑이도 잦아지고 있다. 서울경찰청은 1일부터 시내 전역에서 연말연시 특별단속에 나섰지만 음주운전은 줄지 않고 있다. 교통경찰관 382명이 투입돼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시내 63개 지역에서 일제 단속한 결과 195명이 적발돼 올해 최고 기록을 세웠다.
서울경찰청 배영철 교통안전계장은 “지난해 맹추위로 잠시 주춤하는 듯했던 연말 음주운전이 올해 들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전체 사망사고 가운데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가 20%에 달하는 만큼 다음달 말까지 철저하게 단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도 음주운전에 대해서만큼은 개인적 사정을 무시하고 엄격한 판결을 내리고 있다. 처벌을 받을 경우 생계에 미칠 악영향을 감안해 종종 선처를 내리는 법원이지만 음주운전만큼은 싸늘한 잣대를 들이대는 게 최근 추세다. 법원 관계자는 “순간적인 음주운전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가 법정에서 사정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지만 좀처럼 구제되기 힘든 게 음주운전”이라며 연말연시에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음주운전에 인정사정 없는 법원
●판례1(창원지법/ 2005년)
A씨, "손님을 찾기 힘드니 주차장 입구까지만 차를 빼 달라"는 대리운전 기사의 요구에 주차장 밖 도로까지 5m 운전.
재판부, "거리가 짧더라도 운전을 꼭 해야만 할 사정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판례2(부산지법/ 2006년)
B씨, 술을 마시다가 주차단속 경고방송을 듣고 길거리에 세워둔 차를 주차장까지 14m 운전.
재판부, "사고 위험이 높은 거리에서 운전한 만큼 처벌이 불가피하다."
●판례3(대법원/ 2005년)
C씨, 술에 취한 채 자신의 개인택시를 30m 가량 운전.
재판부, "면허취소시 생계가 어려워진다는 피고인의 사정보다는 사고 방지라는 공익상의 필요가 더 중요하다."
●판례4(광주지법/ 2006년)
D씨, 친구가 음주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가 단속에 걸리자 친구에게 음료수를 먹이고 제지하는 의경 폭행.
재판부 "공무집행방해에 해당한다"며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선고.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