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끔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번잡한 일상을 뒤로하고 쭉 뻗은 철로를 달리다 보면 문득 차창 너머로 한 점이 스쳐 지나간다. 바로 간이역이다. 가을날 코스모스를 벗한 채 외롭게 서 있는 간이역은 단칸집처럼 소담스러우면서도 정겹다.
근대사의 상징물인 간이역은 대도시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문화와 지금까지 소중하게 지켜오고 있던 지역 문화의 만남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보따리 짐을 싸고 새벽 기차를 기다리던 시골 처자의 희망이 움텄던 곳이었는가 하면, 메마른 도시생활을 접고 터덜터덜 고향으로 돌아온 회향객의 애환을 달래주던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간이역은 우리나라 근대기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곳이다. 간이역 주변 여기저기에는 우리 자신들의 추억과 향수가 배어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의미와 개인적 추억을 담고 있는 간이역이 현대화의 물결 속에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근대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애정을 유도하기 위해 대표적인 간이역 12곳에 대해서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였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되는 간이역은 대부분 1930년대에 지어진 역사ㆍ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그중에는 인근의 자연 풍광이 빼어나 하루쯤 날 잡아 찾아가고픈 마음이 드는 간이역들이 많이 있다.
간이역들은 50여년 이상 경과된 것들이 대부분이라 세월의 흐름 속에 낡고 퇴색한 모습이지만, 이는 거꾸로 당시 우리의 소중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 동안 한국철도공사에서 꾸준히 관리하여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기차를 이용하기 위한 시설로서 관리되었으나, 앞으로는 문화재로서 새로운 가치가 만들어지고 보존되고 또한 새롭게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옛 추억을 더듬고 새 추억을 만드는 장소로서, 즉 삶의 체취가 담긴 간이역으로 변모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와 달리 활용에 기반을 두고 보존토록 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재로 등록되는 간이역은 철도역사로 잘 활용하는 것이 첫 번째이지만, 만일 불가피한 경우에는 그 본질을 중시하는 가운데 다양한 활용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정부 혼자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이자 고객인 국민, 지방자치단체, 한국철도공사 등이 간이역을 소중한 근대문화유산으로 새롭게 인식하고 아끼고 후대에 전승하려는 노력이 함께 경주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우리 주변에 100년 전의 역사와 추억을 반추해 볼 수 있는 근대사의 상징물을 보존한다는 것은 현재의 우리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일이다. 간이역은 이제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역으로서만이 아닌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간이역'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김창준 문화재청 문화유산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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