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겨울은 단연 신춘문예의 계절이다.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들 혹은 나이가 들어서도 아직 문학을 단념하지 못한 이들에게 겨울은 자신의 평생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운명의 심판이 매번 한차례씩 휩쓸고 지나가는 계절이다. 그것은 흡사 열병과도 같다.
● 열병을 앓았던 그 시절 문학청년들
주요 일간지에 신춘문예 공고가 정식으로 나기도 전에, 거리를 불어가는 바람에 겨울을 예고하는 찬 공기가 섞이는 시점부터 문청들의 눈은 일종의 광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자주 들르는 술집에 가보면 누구는 필생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머리를 삭발하고 하숙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했고, 또 누구들은 아예 대학교 앞에 여관방을 잡아놓고 신춘문예 대비 합숙훈련에 들어갔다고도 했다.
그랬다. 그 시절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믿을 것이라곤 오직 문학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재능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 학비 때문에 허리가 휜다는 고향의 부모님이 떠오를 적마다 신춘문예는 유일하게 매달릴 수 있는 구원의 밧줄이었다. 그 어떤 문학공모보다 푸짐한 당선 상금도 그렇지만 대학에 따라 그 다음 학기부터 등록금이 전액 면제되는 특혜를 누릴 수도 있었다.
몇 년에 걸쳐 여러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그 상금으로 대학 4년 동안의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했다는 어느 선배 문인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져오기도 했다. 신년 1월 1일자 신문에 자기 이름이 얼굴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실려 허영심을 만족시켜 준다는 것은 차라리 덤이었다.
그랬다. 그 시절 군사정권의 폭압이 서슬 푸르던 그때에도 문학의 꿈을 안고 신춘문예 마감 마지막 날을 기다리던 가난한 청년들은 여전히 많았다. 평소 신춘문예 따위엔 초연한 척하던 친구도 대개 마감일이면 옆구리에 투고작이 담긴 누런 서류봉투를 낀 채 신문로 언저리를 배회하는 모습이 포착되곤 했다.
광화문 지하도쯤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들은 서로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한 친구는 서울신문 동아일보를 거쳐 한국일보 방향으로 가고 다른 한 친구는 조선일보를 지나 경향신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대한민국의 우편행정에 대한 신뢰성이 부족했던 탓일까. 그들은 굳이 자신의 응모작을 직접, 그것도 마감일 최종 시간 직전에 신문사에 전달해야 한다고 믿었다. 괜히 일찍 보내서 산더미 같은 투고작들 밑에 깔리기라도 하면 누가 그걸 정성 들여 읽어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 지금도 신춘문예 공고에 가슴 뛰어
이 밖에도 금기는 많았다. 지금이야 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글을 쓰지만 그 시절엔 반드시 이백자 원고지에 그것도 세로줄로 또박또박 써야 했다.
나같은 악필은 심사위원들이 원고를 들춰보지도 않고 내던질 터이니 반드시 글씨를 잘 쓰는 친구에게 부탁해야 했고, 소설의 경우 당락은 원고 첫 장에서 결판이 나니 서두를 인상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도 했다.
아, 그리운 옛날이여. 그 시절 당락이 결정되고 나면 남는 것은 오직 술, 술 뿐이었으니 크리스마스 즈음의 대학가 술집은 문청들의 난투극으로 꽤 시끄러웠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신문 1면 구석에 난 신춘문예 공고를 보면 저절로 가슴이 뛴다. 그리고 기원한다. 지금도 이 땅 어느 구석에서 신춘문예를 준비하며 칼을 가는 문학 지망생들의 앞날에 영광 있기를.
남진우 명지대 교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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