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강원 양양군 강현면 추정리 낙산해수욕장 입구. 바다와 마주한 조그만 칼국수 집 앞마당에서 김장이 한창이다. 영하 7도의 추위에 바닷바람이 매서워 얼굴을 꺼내 놓기도 벅찬 날씨지만 절인 배추에 김칫소를 넣어 치대는 아낙들의 이마엔 어느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펑퍼짐한 몸빼 차림이지만 다시 보니 아낙들의 얼굴이 앳되고 귀엽다. 1일부터 이곳 욕쟁이할머니손칼국수에서 김장봉사를 하고 있는 성신여대 성김봉사단 소속 학생들이다.
“에라이 시집도 못 갈 년들아. 그렇게 만들면 어떤 놈이 처묵노?” 학생들의 서툰 손놀림을 지켜보던 ‘욕쟁이’ 서정순(75) 할머니의 입에서 걸진 욕이 터져 나온다.
김장독을 묻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 옆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숨을 돌리던 정영남(46) 단장(레저스포츠학과 교수)에게도 “니미럴 놈”이란 욕이 쏟아진다. 정 교수나 학생들은 욕을 듣고도 키득거리며 즐거워 한다. 서 할머니와 봉사단의 유쾌한 실랑이는 김치를 담그는 내내 계속된다.
“비록 남을 도우러 왔다고 해도 일하는 동안은 딴청을 피워선 안 돼. 그런 놈들은 내가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줄 거야.”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봉사단을 다그치는 서 할머니는 올해로 23년째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고 있는 양양의 ‘숨은 천사’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그는 1984년 장사를 하다가 망해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찾아온 이곳에서 우연히 죽어가는 독거노인을 보살핀 게 계기가 돼 40명이 넘는 홀로 사는 노인들을 돌보며 살아 왔다.
여관과 음식점을 운영하며 넉넉지 않게 살아왔지만 노인들에게 끼니를 챙겨 드리고 손수 옷을 지어 입히는 정성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최근에는 연거푸 수해를 입었지만 따뜻한 마음은 그칠 새가 없었다. 6남매 모두 장성한 할머니는 지금 혼자 살고 있다.
섬김봉사단은 2002년 서 할머니의 사연을 접하고 김장봉사에 나섰다. 정 교수는 “처음엔 노인들이 드실 김장김치를 사 드리겠다고 했다가 오히려 욕을 먹었다”며 “진짜 도와주고 싶다면 직접 와서 김치를 담그라는 말에 그 해 겨울부터 이곳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서 할머니는 “남 돕는 게 결코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려고 학생들을 일부러 서울에서 불러 내렸다”며 “찬 바람 맞으며 고생도 하고 노인들한테 직접 김치도 갖다 드리고 해야 봉사가 뭔지 깨닫게 된다”고 강조했다.
올해는 학생 44명과 교직원 등 53명이 김장봉사에 참여해 4,000포기의 김치를 담갔다. 매서운 날씨 속에 배추를 다듬고 고춧가루를 물에 개느라 손은 부르텄지만 학생들은 마냥 즐거웠다.
유현경(23ㆍ가족문화소비자학과 4년)씨는 “새참을 먹고 설거지를 안 했다가 할머니한테 혼쭐이 났다”면서도 서 할머니에게 친손녀처럼 매달렸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온 나가야 아이카(長屋藍化ㆍ도쿄여대 지역문화학과 4년)씨는 “김치를 좋아했는데 이렇게 직접 만들어서 어려운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도울 수 있다니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할머니의 욕이 조금 잦아들자 학생들은 모닥불을 피워 놓은 드럼통으로 쪼르르 달려가 고구마를 굽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할머니의 욕이 터져 나왔다. “처묵을 생각밖에 안 하는 가시나들. 다리 뿐질러 놓기 전에 얼릉 일 안 하나?”
양양=유상호기자 shy@hkc.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