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업을 하는 차문성(49ㆍ가명)씨 가족은 지난해 호르몬 투여 비용으로 2,500만원을 썼다. 폐경기를 맞아 우울증에 빠진 아내(48)의 여성호르몬 보충요법에 1,200만원, 키가 작은 늦둥이 외동딸(13)의 생리 지연 치료에 600만원, 그리고 자신도 중년 남성들 사이에 근력 및 성기능 강화 ‘회춘요법’으로 소문난 성장호르몬을 투여하는데 700만원이 들었다.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왜소증 어린이의 치료와 갱년기증상 완화에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호르몬 요법이 ‘어린이의 키를 크게 하고, 중ㆍ장년층에게 젊음을 되돌려주는 신비의 묘약’으로 오ㆍ남용 되고 있다.
4일 국내 의약계에 따르면 대표적인 호르몬 요법인 성장호르몬의 경우 2000년 연간 300억원에 불과하던 시장 규모가 매년 10~15%의 성장을 거듭, 지난해엔 500억원 규모로 확대됐다. 어린이의 키를 키워준다는 각종 건강기능식품, 성호르몬 분비를 촉진하고 피부와 근력을 탄력 있게 만들어준다는 남성ㆍ여성호르몬 제제와 보조식품 등을 합칠 경우 호르몬제 시장규모는 연간 5,000억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호르몬제를 사용하는 노화방지클리닉, 성장클리닉, 갱년기클리닉, 피부클리닉, 비만클리닉 등 전문 클리닉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호르몬 치료는 본래 내분비내과 영역이지만 검사와 처방이 비교적 간단하고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진료과목과 관계없이 병ㆍ의원은 물론, 한의원들까지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게 의료계의 분석이다. 일부 소아과와 비뇨기과는 남성호르몬을 투여해 남자 아이의 음경을 키워주는 ‘고추 키우기’나 여자아이의 키를 늘리기 위해 생리를 강제로 지연시키는 치료도 하고 있다.
건강기능식품 수입업체들 역시 인터넷을 통해 ‘한 달만 복용하면 키를 10㎝ 이상 키워준다’거나 ‘성호르몬 분비를 촉진하고 근력을 강화해 젊음을 되돌려준다’는 광고와 함께 검증되지 않은 성호르몬 식품과 성장촉진제 등을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호르몬 요법은 아직 의료 선진국에서도 효능과 부작용에 대한 임상기준이 정해지지 않았을 만큼 논란이 되고 있다. 오히려 과잉 투여할 경우 치매, 유방암, 자궁암, 순환기 장애, 당뇨병, 중풍 등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게 의료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서울대의대 내분비내과 이홍규 교수는 “호르몬 치료는 안전성이 검증 안돼 논란이 계속되는 분야”라며 “과다한 호르몬이 인체에 투입될 경우 각종 암 발생 위험이 높아지고, 자체 분비 균형이 깨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기획취재팀= 송영웅기자 news@hk.co.kr
건보 적용안돼 '황금알'… 의사들 너도나도
#1. 중학교 1학년 민선영(13)양은 어릴 때부터 작은 키 때문에 놀림을 받아 2년 전 성장호르몬 치료를 시도했다. 당시 서울 용산구의 모 병원 의사는 민양의 성장호르몬 수치가 정상인 보다 지나치게 낮다며 4주에 88만원 하는 외제 성장호르몬 투여를 권했다. 그런데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은지 3개월 뒤부터 갑상선 수치가 너무 올라가 잦은 흥분과 극도로 민감한 증세가 나타나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후 주사량을 줄이면서 이런 증세는 없어졌지만, 1년간 성장호르몬을 투여해 자란 키는 1㎝에 불과했다. 민양 아버지는 제약사에 나머지 약을 환불 조치하고 의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2. 중소 유통업체에 다니는 박모(26)씨는 키나 몸무게는 정상인데 음경이 작아 고민이다. 성격이 여성스러워 남성호르몬 분비가 덜 되는 것으로 지레 짐작한 그는 최근 인터넷 건강기능식품 사이트에서 ‘천연프로호르몬’으로 분류된 남성호르몬 제품을 구입해 복용하고 있다. 친구에게서 호르몬을 투여하면 음경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듣고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판매처를 찾아낸 것이다. 박씨는 “9만8,000원을 주고 미국에서 수입됐다는 남성호르몬 보충식품 1병(90정)을 구입해 복용하고 있다”며 “직장 동료들 중에도 성기능을 강화하고 근육량을 키워준다는 선전을 믿고 이런 제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1970, 80년대 중년 남성들 사이에선 ‘대포(Depot) 한대 맞으러 가자’는 말이 한때 유행했다. ‘대포’란 남성호르몬의 일종으로, 주사를 맞으면 일시적으로 성기능을 높여주는 효능이 있었다. 이후 먹는 알약까지 나와 음성적으로 유통됐으나 간암 발생의 위험을 높인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라졌다.
그런데 급속한 인구 고령화와 외모지상주의가 한동안 사라졌던 호르몬 요법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고 있다. ‘큰 키’와 ‘탱탱한 피부’, ‘강한 성적 능력’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청춘 주스’ ‘회춘 묘약’ ‘키 플러스’ 등으로 불리는 각종 호르몬제가 주목 받는 이유다.
질병 치료보다 정력ㆍ회춘제로 남용
호르몬 요법 대중화의 일등공신(?)은 의사들이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의료환경에서 일부 호르몬결핍증 환자를 제외하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호르몬 요법은 황금알을 낳는 ‘블루오션’인 셈이다. 낮은 출산율로 경영난에 처한 일부 산부인과는 노화방지ㆍ비만클리닉 등을 표방하고 나섰고, 소아과와 비뇨기과도 성장클리닉이나 갱년기클리닉에 집중하는 추세다. 한의원들도 상당수가 성장ㆍ비만ㆍ노화방지클리닉을 전문으로 내세우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여성호르몬 보충요법은 폐경기 중년 여성에게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을 같이 투여해 갱년기증상을 완화해주는 치료법이다. 여성호르몬 분비가 현저하게 줄어든 중년 여성에게 주사할 경우 골다공증 예방이나 우울증, 피부트러블 개선 등에 효과가 있다. 또 중ㆍ장년 남성이 남성호르몬을 맞으면 근력이 강화되고 발기력이 향상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부에 붙이는 패치형, 먹는 경구형, 바르는 겔 형태의 남성호르몬 제제가 출시돼 있으나 흡수가 잘 안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묻힐 염려가 있어 주사제가 선호된다. 최근엔 한번 주사를 맞으면 3개월간 약효가 지속되는 제품이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문제는 갱년기장애가 두드러진 환자에게 제한적으로 적용돼야 할 성호르몬 요법이 건강한 중년 남녀의 ‘회춘제’로 둔갑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면서 호르몬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정도라면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보완이 가능한데도, 마치 노화를 막고 젊음을 되돌려주는 ‘신비의 묘약’으로 과대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최근엔 성호르몬에 성장호르몬을 같이 투여하는 복합 처방이 유행하면서 치료 비용이 월 100만원을 훌쩍 넘어간다. 1년간 장기 치료할 경우 1,200만~1,500만원이 소요된다.
성장호르몬 역시 당초 왜소증 환자 치료용으로 개발됐으나 지금은 오히려 중년 남성들의 근력 강화와 정력제로 더 많이 사용된다. 일부 소아과와 성장클리닉을 표방하는 한의원들은 여자 아이의 생리가 시작되면 성장판이 닫혀 키가 크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 생리 시작을 강제로 늦추는 ‘생리 지연’ 치료를 하고 있다. 또 서울 강남의 일부 소아과와 비뇨기과에선 남성호르몬을 투여해 남자 아이의 음경을 키워주는 ‘고추 키우기’ 시술도 성행하고 있다.
검증되지 않은 호르몬 기능식품 범람
더욱 심각한 문제는 효능과 부작용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각종 호르몬제가 인터넷을 통해 무분별하게 유통되고 있다는 점이다. 청소년들도 인터넷에 들어가면 성장호르몬을 비롯, 남성호르몬, 여성88? 멜라토닌, DHEA, 프레그네롤론, 감마리놀렌산 등 ‘슈퍼호르몬’으로 불리는 각종 호르몬 제품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 심지어 국내 상위권 제약사들도 외모지상주의 붐을 타고 검증되지 않은 성장발육 기능식품과 키 성장 운동기구, 성장촉진제 등을 판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성장을 도와준다는 건강기능식품을 무분별하게 복용하면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작은 키는 영양학적 문제보다 유전적 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데, 충분한 영양공급이 이뤄지고 있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영양을 공급해 성장을 유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호르몬 치료 역시 엄청난 비용에도 불구하고 의학적 효과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게 의학계의 중론이다. 호르몬제를 투여하면 노화에 따른 생리적 변화를 부분적으로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으나, 어떤 호르몬도 노화를 예방하거나 지연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호르몬을 과잉 투여할 경우 자체 호르몬 분비 기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유방암 갑상선암 등 각종 암과 당뇨병, 치매, 중풍, 갑상선 기능 저하, 전립선비대증 등의 부작용을 유발할 위험이 커진다.
서울대의대 이홍규 교수는 “장기적인 투여로 호르몬 수치가 높아지면 피드백 기능에 의해 자체 호르몬 생산ㆍ분비가 줄어들어 몸의 균형을 깨뜨린다”며 “장기간의 치료가 필요한 분야에 호르몬 요법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기획취재팀=고재학(팀장)ㆍ송영웅ㆍ김용식ㆍ안형영기자 news@hk.co.kr
신의 선물인가 독소인가
‘호르몬은 신의 선물인가, 인간이 오용하는 독소인가.’
호르몬 요법의 효능과 부작용에 대해선 국내는 물론 해외 의학계에서도 찬반이 엇갈린다. 폐경기 중년 여성들에게 여성호르몬 대체요법을 실시하면 성교 만족도가 높아지고 피부 탄력이 살아나는 등의 가시적 효과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라는 지적이 있듯, 장기적인 호르몬제 투여의 안전성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2002년 7월 ‘폐경 후 여성의 호르몬 치료가 유방암이나 뇌졸중, 심장발작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해 파문이 일었다.
미국 웨이크포리스트대 샐리 슈메이커 교수는 2003년 미국의학협회지에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의 복합제인 ‘프렘프로’를 먹는 65세 이상 여성은 일반 여성에 비해 알츠하이머와 혈관성 치매에 걸릴 위험이 두 배 가량 높아진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또 같은 해 미 웨인주립대 수전 헨드릭스 박사도 “프렘프로가 악성 유방암을 일으키고 유방암의 진행을 빠르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대한폐경학회와 남성갱년기학회 등은 “한국은 질병의 발생 빈도와 발병 연령 등이 달라 미국의 연구결과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면서 “과잉 투여할 경우 일부 환자에게서 부작용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만큼 전문의와 상의해 정밀 검사 후 사용하면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서울병원 윤병구 교수팀도 “여성 알츠하이머 환자 55명에게 복합 호르몬제를 투여했더니 치매의 진행을 더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밝혔다. 윤 교수는 “미국의 연구결과는 원래 있던 암세포가 호르몬제 투여의 영향으로 빨리 자라서 발견이 잘 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장기적으로 호르몬제를 쓸 때는 유방암, 단기에는 혈전증을 조심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양대의대 내분비내과 최웅환 교수는 “일부 병원들이 수입을 올리기 위해 호르몬 제제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지나치게 많은 호르몬이 체내에 들어오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는 만큼 전문의의 정확한 진단에 따라 조심스럽게 복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재학(팀장)·송영웅·김용식·안형영기자 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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