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32강전, 16강전도 치르지 않았는데 마치 결승전이 임박한 것 같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함께 한국전쟁 종전 선언 문서에 공동 서명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는 서울의 언론 보도에 대해 워싱턴의 정통한 북핵 문제 전문가가 한 말이다.
● 종전 선언, "우물에서 숭늉 찾기"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 언론과, 또 이 보도의 출처가 됐을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북핵 6자회담 재개와 관련해 조급증을 갖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참패를 당한 이후 워싱턴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 비근한 예로 워싱턴의 각종 싱크탱크에서 북한 문제를 다뤄 온 민주당 계열 전문가들의 목소리에는 부쩍 힘이 실리고 있다.
강경파와의 갈등 때문에 제2기 부시 행정부 출범 때 해임된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의 '날개 꺾인 소신'에 대한 평가도 한층 격상되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민주당 행정부 시절 북핵 해법의 골간이었던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 체제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과 논의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렇다고 해서 변화를 추진해 가려는 이런 세력들이 부시 대통령의 방향 선회 가능성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 종전 선언 관련 발언 등을 주요하게 다룬 미 언론을 찾아 볼 수 없거니와 전문가들도 여기에 거의 주목하고 있지 않다. 이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종전 선언 서명 같은, 아직은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의 '이벤트'로는 북한을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북한은 종전 선언이나 평화협정 등을 당연히 '확보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를 그럴듯하게 포장한다고 해서 북한이 감동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도 이 같은 사정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6자회담 재개에 임하는 미국의 진정성을 알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면 그것은 그대로 이해할만한 일이다. 다만 6자회담 재개를 위한 협상 분위기를 좋게 유도하려는 이런 노력이 현실을 바로 보는데 지장을 줄 정도가 돼서는 안 된다. 6자회담의 성공은 한국 국내 여론에 호소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북한의 의도와 실체에 관해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다가'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 및 핵 실험 과정에서 심각한 판단착오를 빚은 과오를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한국 정부
오히려 한국 정부는 이제 남한이 북한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지렛대를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이 늘고 있는데 대해 긴장해야 한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최근 워싱턴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난해 9ㆍ19 베이징 공동성명이 나올 땐 그래도 우리의 역할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한 것도 새겨 들어야 한다.
송민순 신임 외교통상부 장관은 취임사에서 외교에서의 열정을 강조했다. 열정이 불합리한 노선이나 이념과잉과 연결된다면 그 결과는 참담할 수 있다. 열정도 중요하지만 냉철함이 더 필요한 때라고 여겨진다.
고태성 워싱턴특파원 tsg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