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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12월, 자선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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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12월, 자선의 기적

입력
2006.11.30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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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일보의 칼럼에서 읽은 이야기가 늘 생각난다. 미국의 버지니아주에 있는 한 회사 직원들이 폐암과 싸우는 동료를 위해 자신의 휴가를 몰아주고 있다는 이야기다. 바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베트남계 여성은 유급병가가 끝났지만, 동료들의 휴가 선물로 월급을 받으면서 더 오래 요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선물, 이런 자선도 있구나. 나는 해마다 흐지부지 흘려버린 나의 휴가를 돌아보았다. 누군가에게 주었다면 그처럼 유용하게 쓰였을 날들을 나는 그저 달력에 적힌 며칠로만 생각했다. 우리가 가진 것들, 사랑 능력 돈 시간 등을 무심하게 잠재워두거나 낭비하는 것은 죄라는 생각이 든다.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것이 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가 가진 것 낭비하는 건 죄악

며칠 전 신문에서 또 가슴 뭉클한 기사를 읽었다. 일본군 위안부였던 황금자(82) 할머니가 평생 모은 4,000만원을 서울 강서구청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는 이야기다.

여섯살에 부모를 잃고 열일곱살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그는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왔지만 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한 채 독신으로 어렵게 살았다. 한평생 환청과 망상에 시달렸고, 길에서 교복 입은 남학생들이 몰려오면 일본군이라는 착각에 소스라칠 정도였다고 한다.

4년 전 그에게 동회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 김정환(41)씨가 찾아왔다. 괴팍한 성격에 남을 믿지 않아 외톨이로 지내며 사납고 무서운 할머니로 온 동네에 소문났던 할머니는 김씨의 정성스런 보살핌에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악몽 같은 지난 날을 조금씩 김씨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죽을 때 관 속에 넣어 가지고 가겠다"던 할머니는 김씨에게 "내가 모은 돈 너를 주고 가겠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뜻 있는 일에 쓰셔야 한다"고 김씨가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할머니는 "네가 안 받으면 무덤에 가지고 가겠다"고 고집했다.

지난 여름 심하게 앓았던 할머니는 김씨가 자리를 봐 둔 공원묘지를 함께 돌아보다가 "네 말대로 할란다"고 말했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돈을 내놓겠다는 결심을 한 후 그는 행복한 할머니가 됐다. 괴팍함도 욕설도 잦아들고 밝은 얼굴로 예쁜 스카프를 목에 두르기도 했다.

일본군위안부 생활안정지원금과 기초생활보조금을 합쳐 매달 110만원을 받는 황금자 할머니는 난방비를 아끼려고 방에서도 파카를 입고 지낸다고 한다. 밑반찬 몇 종류와 소주 12병이 들어있었다는 할머니의 냉장고…. 한 많은 할머니를 달래준 친구는 소주였나 보다. 친구 1병으로는 불안해서 12병이나 사두었나 보다.

벌써 12월, 정신없이 지낸 한 해를 돌아보면서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게 되는 달이다. 잘 따져보면 우리가 가진 것들은 많다. 나의 휴가 며칠을 필요한 이에게 선물하면 그 며칠은 값진 날들이 된다. 암으로 투병하는 동료를 위해 직원들이 휴가를 몰아주고 있는 회사는 복된 회사다. 그 회사에 충만한 따뜻한 에너지를 서울에서도 느낄 수 있다.

황금자라는 번쩍거리는 이름을 가졌던 한 소녀는 부모도 나라도 없는 최악의 상황에 내팽개쳐졌다. 그의 생은 일찍 짓밟혀 한번도 꽃핀 적 없이 시들었다. 그를 구원한 것은 자선이다. 어려운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선의 마음을 회복함으로써 그는 피 맺힌 한에서 해방됐다.

● 나라 갈등도 자선으로 치유되기를

할머니의 관에 담겨 땅속에서 썩을 뻔했던 돈은 어려운 학생들에게 희망을 줄 복된 돈이 됐다. 그 돈은 기뻐서 노래하고 있다. 환청과 망상과 한에 시달리던 할머니는 이제 웃을 수 있게 됐다. 자선은 기적을 만든다.

그 기적이 우리 모두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기적을 이끌어낸 김정환이라는 동회 직원의 미담이 산산이 흩어진 공직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온 나라에 가득한 증오와 갈등, 절망과 자포자기가 자선의 기적으로 치유되었으면 좋겠다. 황금자 할머니의 인생역전에서 대통령도 국민도 배울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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